[김부복의 고구려POWER 29]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1918년 4월, 독일군이 벨기에 남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 아무리 다그쳐도 병사들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한 장교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영국 방위군이 없었음에도 진군이 멈추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적군이 버리고 간 참호 속의 풍부한 비축식량을 보자 독일군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군인들은 더 이상 명령을 듣지 않았다. 수년 동안 굶주려온 이 병사들은 눈앞에 양식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맹렬하게 음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병사들은 총검으로 영국군의 빵 자루를 찢고, 미제 통조림을 뜯어서 목이 막히도록 먹어댔다. 간청도 협박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마치 짐승처럼 먹어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배를 양껏 채우는 일이었다. 잠시 후에 죽더라도 말이다.

이 독일 병사들은 몇 주 동안 빗속에서 야영을 하고, 적이 퍼붓는 총알과 지뢰와 폭탄 속에서 움푹 들어간 눈으로 불평 없이 묵묵히 진군하던 바로 그 병사들이었다. 연합군의 총칼도 그들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지만, 흰 빵 덩어리와 소금에 절인 고기조각을 보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빵의 역사, 하인리히 E.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

먹지 않고 전투를 할 재간은 없다. 독일 병사들을 멈추도록 만든 것은 ‘빵’이었다. 적의 대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픽사베이

‘빵’이 적의 발목을 잡는 작전은 고려 때 벌써 시도되고 있었다.

공민왕 8년(1359) 12월, ‘홍건적’ 잔당인 모거경(毛居敬)이 4만 병력으로 고려를 침범했다. 모거경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義州)와 정주(靜州), 인주(麟州)를 함락했다.

공민왕은 이암(李嵒)을 서북면 도원수로 임명하는 등 방어계획을 세우고 서경(西京)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직 군사들의 집결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신하들이 창고 비축물자를 태워버리고 후퇴, 요새를 확보해서 방어하자고 건의했다. 그러자, 반론이 나왔다.

“적은 멀리 행군해서 우리 영토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사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는 없습니다. 평양성을 미끼로 내줘서 남하를 일단 멈추게 하고, 대비할 시간을 얻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창고에 가득한 물자를 보면 적은 1개월가량은 머물 것이고, 그 기세가 무뎌질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공격해서 평양을 수복하면 됩니다.”

공민왕은 그 반론을 받아들여 서경을 내주고 후퇴, 황주(黃州)에 주둔했다. 하지만, 역효과가 생겼다.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진 것이다. 공민왕은 뒤늦게 이암의 도원수 직책을 박탈하고, 평장사 이승경(李承慶)을 후임으로 임명해야 했다.

훗날,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은 ‘도적고폐(導賊庫閉)’라는 응용된 작전을 써먹기도 했다. ‘도적고폐’는 적이 쳐들어오면 저항하지 말고 재물을 쌓아둔 창고로 인도하자는 작전이다.

적이 창고에 쌓여 있는 재물에 빠졌을 때 밖에서 빗장을 잠그고 포위하면 적은 도망갈 수도 없다. 그렇게 적을 잡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는 고구려가 이미 1000년도 더 전에 써먹은 작전이다. 고구려의 전통적 방어수단은 #청야전술이지만, 이 전술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역(逆) 청야전술’을 펴기도 했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쳐들어왔을 때,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를 평양성으로 끌어들인 ‘유인작전’이 대표적이다.

내호아가 정예병 4만명을 추려 평양성을 공격해오자, 방어를 맡은 임금의 동생 건무(建武)는 '성하(城下)의 인가마다 재백(財帛)을 열치(列置)하고 수나라 병사의 상륙을 방임'했다.

고구려는 대국(大國)이다. 그 대국의 심장부인 평양성은 부(富)가 넘치고 있었다. 금과 은, 비단 등 ‘재백’이 그냥 버려져 있으니, 수나라 병사들은 ‘노략질’하는 데 정신이 팔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무는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불과 500명의 ‘결사대’가 덮쳤는데도 대오가 산란해진 수나라 병사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내호아는 이 싸움에서 병사 4만명을 모두 잃고 단신으로 소선(小船)을 타고 도망쳐야 했다. 내호아가 잃은 것은 병사뿐 아니었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의 군사에게 공급할 양곡을 배에 싣고 왔는데, 그것까지 모조리 잃어야 했다. 그 바람에 식량이 부족해진 수나라 군사는 오합지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이 전투를 이렇게 평가했다.

“고구려가 벌써 이때에 필승(必勝)의 지위를 가짐이니, 만일 전공(戰功)을 등차(等次)하면 건무가 을지문덕보다 ‘제 1등’이라 할 것이다”

국력이 형편없었던 조선 때에는 양곡을 통째로 왜병에게 내주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 임금은 평양으로 피신, 무슨 일이 있어도 평양만큼은 사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백성은 발표를 믿고 평양으로 몰려들었다. 여러 고을에서 양곡도 운반해 챙겨놓았다. 모두 10만섬이나 되었다.

그렇지만, 선조는 왜병이 대동강 건너편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그대로 의주로 도망치고 말았다. 분노한 백성은 궁녀와 대신의 길을 막고, 몽둥이질까지 했다. 선조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궁녀까지 끌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경황이 없어서 양곡까지 가지고 가지는 못했다. 평양에 쌓아두었던 양곡은 고스란히 왜병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의병의 활약 때문에 보급로가 끊겨 고심하던 왜병은 뜻밖의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군은 이후 양곡 확보에 애를 먹어야 했다. 여러 고을에서 양곡을 끌어 모았지만, 모두 5만1488섬에 불과했다. 5만 병력이 두 달 버틸 수 있는 양곡밖에 되지 않았다.

빼앗긴 10만섬은 5만 병력이 넉 달이나 먹을 수 있는 양곡이었다. 체격이 작아서, 먹는 양이 적은 왜병에게는 더욱 오래 버틸 수 있는 양곡이었다. 우리 것이 남에게 넘어가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청야 전술(淸野 戰術)=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

 

 김부복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opiniontimes.co.kr)도 보장합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