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공모전 수상작]

[오피니언타임스=양준하] 법적으론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검정고시생이고, 실제론 비인가 대안학교를 나온 대안학교 출신에겐 누군가 “어느 고등학교 나오셨어요?”라 묻는 것만큼 당혹스러운 순간이 없다.

물어본 이가 바라던 ‘정답’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정고시생이라 답하면, 어떤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사람 취급을 하고, 대안학교를 나왔다 하면 대개 품행이 불량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나, 가끔 뉴스에 등장하는 상류층 자녀가 다니는 귀족학교 출신으로 안다. 그렇다고 “공교육의 입시 위주 경쟁교육이 아닌,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대안적 학교”에 다녔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모두가 피곤해지지 않는가. 

그렇다. 나는 대안학교 출신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안학교의 정의는 학창 시절 선생님들께서 우리에게 강조하던 말이었다. 거창한 표어를 내걸고 있는 교육인 만큼 학교에선 공교육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들을 많이 알려주었다. 우리가 직접 연극을 만들어 발표했고, 아이템을 선정하고 창업해 프리마켓에서 물건을 팔았고, 80일간 인도에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직장을 정해 한 달간 인턴 생활을 했다. 누군가는 신기하고 특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가 배우는 교육이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교육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학교가 좋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다양한 사상과 활동들이 좋았고, 학교에서 동기, 후배, 선배, 교사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픽사베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내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있었는데, 학교 밖으로만 나가면 의기소침해진다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부족한 부분이야 차고 넘치겠지만, 특히 다양성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내가 받는 교육은 ‘틀린’ 교육이었다. 좋은 대학이란 목표를 따라 모두 맹목적인 질주를 하는 동안 나는 연극을 하거나, 여행을 간다거나, 농사를 짓는 등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나는 ‘베짱이’였고, 언젠가 크게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너 지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힘들어”, “좋은 대학 가서도 취업 못 해서 안달인데, 너는 어쩌려고 그러니?”  친척이나 어른들에게 내가 받는 교육을 부정하는 발언을 들을 때면 큰 폭력으로 느껴졌고, 10대였던 나는 이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주 위축됐고 불안했다. 어느새 나도 내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남에게 내가 대안학교를 다닌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틀린 사람으로 비칠까 봐 두려웠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였을 뿐인데.

먼저 걸어와 길이 된 사람들

졸업을 하고 운이 좋게 대학에 입학했다. 나도 이제 틀린 교육이 아닌, 정답인 교육을 받는구나~ 생각했던 것도 잠시, 새로운 정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문대, 대기업, 정규직. 이곳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패배감을 느껴야 했다. 세상은 이미 무수히 많은 ‘틀림’을 만들고 있었다. 이상했다. 문득 이런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1등을 제외한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고, 서로 밟고 밟히는 경쟁을 일상으로 만드는 이 사회야말로 오답이 아닐까?”

세상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삐딱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후배 J는 1년간 열심히 알바를 해 돈을 모으더니 무작정 유럽으로 떠났고 지금은 덴마크에서 자유시민대학을 다니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통일에 관심이 많던 L은 이제 통일운동 투사이다. 가끔 광화문에 가면 그가 제일 앞줄에서 확성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학동기 D는 졸업 후 농사를 짓겠다 하고, 청년 소모임 교류공간에서 만난 퇴직자 K씨는 퇴직자의 삶을 조명한 전시를 열었다.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는 기후위기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촉구하며 매주 금요일마다 학교 대신 의회 앞에 섰다. 그녀 덕분에 각국의 정상들이 기후위기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 다른 목적을 가진,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만약 그들이 세상의 정답에만 얽매였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비록 세상이 보기엔 ‘괴짜’, ‘루저’이지만 내가 본 그들은 자신이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마치 내가 세상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받는 대안 교육을 있는 그대로 느꼈을 때 행복했던 것처럼.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길이 생기기 이전 그곳을 처음으로 걸어간 이들.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 “정답은 없다. 각자의 다양한 답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무수히 많은 샛길이 생겨났을 때, 세상은 비로소 각자의 길을 존중해 줄 것이다. 나는 다만 그들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세계는 이전부터 그런 사람들을 자주 괴롭혀 왔지 않았던가. 그들이 끝까지 제 길을 가서 새로운 길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려주길. 오늘도 세상의 따가운 시선들을 느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 이들에게 용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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