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늘의 하프타임 단상 20]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경영사상가로 90세 나이에도 왕성하게 저술과 컨설팅 활동을 하고 있던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 교수에게 누가 물었다.

“거야 물론 이혼 안 당하는 거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GE의 잭 웰치나 Microsoft 빌 게이츠 같은 기업인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최고의 경영학자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은 피터 드러커. 그가 평생의 나침반으로 삼은 말이 있다. “너는 죽은 뒤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드러커가 13살 때 일이다. 종교 수업시간에 필리글러 신부가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물었다. “너는 죽은 뒤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그 나이 아이들이 답할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은 아니었다. 필리글러 신부는 말을 이어갔다. “너희가 이 질문에 대답할 것으로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희가 50살이 돼서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헛산 것이다.”

60년이 흘러 이들이 73세가 됐을 때 동창회가 열렸다. 거의 모두가 어릴 적 선생님이 한 질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질문을 계속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것이 자신을 바른길로 이끌어 주었다고 회상했다. 피터 드러커가 찾아낸 답은 이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너는 죽은 뒤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나는 오늘에야 이 질문 앞에 선다. 50살 넘긴 지가 언젠데 내놓을 답이 없으니, 헛산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너무 하찮은 대답밖에 할 게 없어 꺼내놓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늦은 게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다.

Ⓒ픽사베이

집에 어린아이가 없어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어릴 적 많이 듣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너는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대답은 대략 이랬다. “대통령이요”, “대장이요”, “선생님이요”, “간호사요”…. 이런 대답이 어른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넌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느냐가 곧 내 정체성일 터이다. 그렇다고 직업이나 지위가 정체성이 될 수는 없다. 내가 가진 것들로 포장된 정체성은 시간이 흐르면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되는가보다는 무엇이 되느냐에 정신을 팔며 살아왔다. 내가 가진 것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인제 와서 새삼스레 내 정체성을 고민한다. 이제야 비로소 소유가 아닌 존재로 진정한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The best is yet to come!(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내 카카오톡 프로필 메시지다. 그것을 보고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오늘이 가장 좋은 날 아니냐고. 그 말에 동의한다.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가장 좋은 날을 기다린다.

그것은 ‘꿈 너머 꿈’같은 것이다. 가장 좋은 날에 내가 꿔야 할 꿈. 그건 욕망하고는 거리가 있다. 내가 그동안 하지 못하고 미루어 왔던, 이제 더 늦기 전에 찾아 나서야 할 ‘가치’다.

내 인생에서 제일 잘된 일을 들라면 나는 신앙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당장 피부로 느끼는 이점은 이로 인해 덜 외롭다는 것이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 나침반이 돼주는 것도 큰 도움이다. 기본적인 나의 정체성은 이미 주어진 셈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찾는 정체성은 ‘내게 주어진 정체성에 걸맞은 삶’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살아온 세월이 무가치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열심히 살아온 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창조된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사실 죽은 후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지금껏 생각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가치 있는 삶을 원하는 것은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세상을 떠날 때 ‘가정을 이룬 것’ 말고도 보람 있었던 기억 하나쯤 갖고 가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식어버렸지만 한동안 내 가슴을 뛰게 한 꿈이 있었다. 브릿지(bridge)가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더 나은 곳으로 건너가는 데 디딤돌이 되고 싶었다. 다시 꿈을 꾼다. 휠씬 소박해진 꿈이다. 안도현 시인이 노래한 ‘연탄 한 장’ 같은 삶이다.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안 도 현 -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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