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I.

어머니가 처음 앓아누웠던 1982년 즈음에 파주시 야동동에 있는 감리교묘지를 마련했다. 이곳에 어머니가 1988년에, 1994년에는 아버지가 차례로 묻혔고, 6.25 피난길에 돌아가신 할머니 묘도 1996년 수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교회묘지라서 안심했던 묘원이 근처의 개발바람을 타고 '정체를 알 수없는' 사람들의 이권 다툼장이 되더니, 급기야는 묘지관리 주체가 바뀌기까지 했다. 아직까지는 별일이 없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부모님 묘지문제는 언제든 논의를 마무리해야 할, 중요한 현안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유교질서에서 제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장남이 가끔 화두로 던지기는 하나 본격적으로 논의된 바 없이 흐지부지 될 뿐, 언제나 별다른 결론없이 끝난다. <현재 묘역 상황변화에 따른 이장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결론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묘지문제는 오래된 우리사회의 이슈였고, 근래들어 매장문화가 화장으로 바뀌어 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픽사베이

II. 

장례와 제사는 우리나라 유교적 가족주의 요소 중 마지막에 해당한다. 유교적 교리에 의하면 자식은 자나 깨나 효를 행해야 하는데 그것을 단계별로 보면, 일단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지성으로 모셔야 한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효를 다하라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 효의 시작인 1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빚을 내서라도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야 한다. 마지막 가시는 길이니 온갖 정성을 다해서 모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효라고 지탄받는다. 따라서 꼭 분묘(墳墓)에 매장해야만 하고, 풍수지리 등을 잘 살펴 묘택을 정하고 최대한 넓고 호화롭게 장식해야 한다. 2단계의 효다.

유교적 전통문화에서 화장(火葬)은 상상할 수 없는 불효였기 때문에 화장을 주창하거나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이 과거 우리사회였다. 과거 화장은 '문화' 개념은 커녕 '불효의 대명사'같은 것이었기에 특별히 종교적 이유나 신념, 유언이나 불의의 사고 등을 제외하고는 ‘빚을 내서라도’ 매장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유교적 효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장례가 끝나면 3단계의 효가 펼쳐진다. 3년간 묘 옆에서 부모님 산소를 지키며 사는 것이다. 할 수 없으면 최소한 집안에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 문안드리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알리고 나가는 등 마치 부모님이 살아있는 듯 대해야 한다. 

탈상이 되면 그때부터는 돌아가신 날과 명절날 등과 같이 일년에 몇 번씩 제사를 지내는데, 이것을 고조할아버지 대까지 다하려면 고생도 고생이려니와 경제적 부담도 보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효가 3단계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4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고조 이상, 즉 5대 이상은 전부 한번에 묶어 시제(時祭)를 지내야 한다. 사정이 이쯤 되었으니 유교적 효사상에 의한 장례와 제사문화는 어떻든지 간에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는 조선시대 식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소위 신자유주의적 실용주의를 지향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요구된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III.

한국의 유교적 효사상과 매장, 분묘, 제사문화의 역사적 종교적 배경에 대해, 또한 <화장 현상>에 대한 면밀한 진단과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최근, 매장에서 화장으로 장묘문화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적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다소나마 세대 간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죽음장사꾼적 장례마켓팅으로 기획된 ‘실용주의적 효’에 타협하고 살고 있는 느낌은 나만이 아니다. 애초에 불효자에 가까운 내가 <타협된 효현상>에 대해 특별히 할말이 있을 리 없다.

효율적 국토이용과 허례허식 근절이라고 하는 대의명분은 그렇다 치고, 화장은 곧 불효라는 과거의 인습에서 벗어나 화장을 선호하게 된 우리의 현실이 ‘허례를 모두 물리쳤는가’ 하는 의문은 그대로 남는다. 게다가 화장이 급증하면서 무엇보다 충분한 화장장 확보가 필수인데, 지역주민의 표를 의식했는지 각 지자체는 물론, 님비를 외치며 반대하는 일반국민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요즘 특정한 지역에서 화장을 하려면 줄을 '나래비'로 서야 할 판까지 됐는데, 이에 대한 필수불가결한 화장장 건립은 반대하면서 ‘화장이 매장을 앞섰으니 우리나라의 장묘문화는 선진화되고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자화자찬은 얼마나 모순이며 이율배반적인가. 아다시피 화장(火葬)은 시신(屍身)을 불태워 분골(粉骨)로 만드는 방법을 말하는데, 과거에는 분골을 강이나 바다, 산 혹은 특별한 장소에서 산골(散骨)하는 방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납골당과 납골묘에 분골을 안치하는 방식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IV.

납골당은 죽은자의 아파트이며, 납골묘는 죽은자의 독립주택이다. 때로는 대가족의 종가에 해당하는 규모나 형태를 띠고 있다. 마치 신발장처럼 설비된 현재 납골당은 서민형아파트식의 경우, 보통 사람 눈높이에 해당하는 로얄층이 천만원 이상을 호가하고, 별도의 동(棟)이나 칸에 마련된 호화맨션이나 빌라식 납골당은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또한 국적불명의 모양을 지닌 납골묘의 경우는 종가답게 그 면적이 과거의 호화분묘를 능가하며 그 가격은 산(生)사람의 집값이상이다.

턱도 없이 확인도 안 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례로 최근 몇 년간 호황을 누리는 A시의 모 추모관이나 K시의 납골묘지의 대대적인 분양광고를 보면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납골묘나 납골당이 설치되는 면적이 과거의 분묘가 차지하는 면적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 의미에서 긍정적 변화나 장묘문화의 선진화, 허례허식의 배격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과거 매장문화의 분묘를 마련하는 비용이나 진배없다.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빈부의 격차, 과거의 효사상이 병적으로 굴절되고, 졸부사상이 나타나는 또 다른 형태의 허례허식이 죽음마케팅에 의해 조장되고 있진 않은가.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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