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 250주년 특별기획 '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 5

茶山의 토지개혁 사상은 <전론(田論)>에 담겨 있는데, 훗날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의 기초가 된 <전론>은 유배시절이 아니라 곡산부사로 있던 정조23년(1799)에 작성되었다. <전론(田論)>에서 선생은 ‘부자 1인의 전지(田地)가 100결 이상이면 1호(戶)를 살찌우기 위해 990명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며, 400결 이상이면 1호를 살찌우기 위해 3,990명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며 조정에서 마땅히 부자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사람에게 보태 주어 그 재산을 고르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茶山은 토지는 소수 양반 지주들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모든 백성들에게 내려 준 공물(公物)이라고 생각했다. 또 동양의 이상적 토지제도인 정전제(井田制:중국 고대 주(周)나라에서 시행한 것으로 인정한 토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나누어 주변의 여덟몫은 여덟 호(戶)에서 나누어갖고 가운데 한 몫인 9분의 1은 공동으로 경작해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이다. 이는 토지를 평등분배하는 것으로서 동양에서 이상으로 삼은 토지제도였다.)는 한전(旱田:밭)과 평전(平田:높은 곳에 있는 평평한 땅)에서만 시행할 수있는데 조선은 이미 수전(水田:논)을 하고 있으며 산골짜기까지 개간되었으니 시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선생은 대신 마을 단위 토지제도인 여전제를 주장했다.
이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지를 얻도록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면, 여전법(閭田法)을 시행해야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여전이라 하는가. 산골짜기와 하천의 지세를 가지고 경계를 그어 삼고는, 그 경계에 포함된 것은 여(閭)라 이름하고 ∙∙∙ 여에는 여장(閭長)을 두고 무릇 1여(閭)의 전지(田地)는 1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그 전지의 일을 다스리도록 하되, 서로간의 경계가 없게 하고 오직 여장의 명령만을 수행하도록 한다.
매양 하루하루 일할 때마다 여장은 그 일수(日數)를 장부에 기록해 둔다. 추수가 끝나면 무릇 오곡(五穀)의 곡물을 모두 여장의 당(堂)으로 운반하여 그 양곡을 나누는데, 먼저 국가의 세를 바치고,그 다음은 여장의 녹봉(녹봉)을 제하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날마다 일한 것을 기록한 장부에 의해 분배한다.                              -전론-

1여(閭)의 크기에 대해 정약용은 "주나라 제도에 25가(家)를 1여라 한다. 이제 그 이름을 빌려 대략 30가에서 드나듦이 있게 하되 또한 반드시 그 율이 일정하지는 않다"라고 하여 30여가 남짓한 규모를 구상했다.

주목되는 것은 여(閭)에 대한 선택권이 인민(人民)에게 있다는 점이다. 백성들에게 ‘여’의 선택권을 주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자주 왕래하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8~9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라 안의 전지가 고르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배층이 백성들을 엄한 법과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정약용은 백성들에게 모든 선택권을 주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백성들이 살 곳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백성들이 지배층을 스스로 선출하는 것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茶山에게 여전제는 토지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이상적인 마을공동체 건설 방안이기도 했다. 그는 군제(軍制)도 여전제를 바탕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장이 초관(哨官)이 되고, 세 여(閭)가 모여 이루어지는 이(里)의 이장은 파총(把摠), 다섯 이(里)가 모여 이루어지는 방(坊)의 방장(坊長)은 천총(千摠)이 되고, 방 다섯이 모여 이루어지는 읍(邑)에는 현령(縣令)을 두어 관할하게 하는 것이 그의 군제개편론이다.

茶山의 여전제, 그리고 여전제에 토대를 둔 군제개편론은 호포제(戶布制)와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들은 군역을 면제받고 가난한 상민들만 군역의 의무가 있어서 군포(軍布)를 납부하자는 것이었다. 호포제는 영조도 실시하려 하다가 양반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법이었다.
茶山은 여전제에서 1여의 백성을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실제 호정(戶丁:성인남성)을 내어 군사를 편성하고, 나머지 둘은 호포(戶布)를 내어 호정이 나온 집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구상했는데, 이는 모든 백성들이 다 병역의 의무를 지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유배시절 경전을 통한 중국 고대의 제도들에 대한 연구를 거치면서 크게 수정되었다. 즉 茶山은 이 연구를 통하여 요∙순∙3왕국시대의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간주하게 되었고, 정전제(井田制) 또한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경세유표의 田制 1-4>를 통하여 정전제 실시 불가능론을 비판하고, 정전제는 오늘날에도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정전제란 모든 토지에서 정전 구획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획정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계산상으로만 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전제의 즉각 실시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전제의 구일세법(九一稅法: 1/9을 세로 바침)의 원리라도 이용하여 전정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하였음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茶山은 자영농민을 기반으로 국가경제를 튼튼히 하려는 계획이었으므로, 특권 상업 및 독점 상업에 대해 반대하였으며, 다만 상업으로 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소극적으로 나마 수용하고 있다.
한편, 광산은 국가에서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광산경영에 있어서의 민간자본의 존재를 배제하였는데, 이는 여전제(閭田制)를 통하여 국가와 농민사이에 존재하는 지주(地主)를 없애려 한것과 의미가 통하는 것이었다.
/다산문화교육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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