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진의 청년의 눈]

[청년칼럼=윤유진] 우리가 흔히들 “실험” 하면 떠올리는 그 이미지, 가령 시험관에다 각종 색깔의 액체를 넣고 가열하면서 뭔가를 측정하는 자연과학적 연구 방법이 사회과학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사회과학 연구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연구 대상이 “사회”이기 때문에, 자연과학 연구와 달리 사회를 이루는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고 실험값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실험값의 타당성을 저해시키는 요인 중에는 “실험집단의 오염”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실험이 그렇듯 실험에는 실험적 처리를 가하는 ‘실험집단’과 실험적 처리를 통제하는 ‘통제집단’이 존재한다. 실험집단은 실험처리 외에 다른 요소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요소에 의해 결과가 변한다면, 그 결과는 객관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라는 대로~ 바라는 대로~”라는 노래처럼 실험자가 바라는 대로 실험집단이 움직이려고 할 때, 한마디로 실험집단이 실험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며 실험에 임할 때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실험집단이 오염됐다고 말하며, 다른 말로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부른다. 필자는 한국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실험집단으로 보고, 이 실험집단이 실험자에 의해 깊게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주관적 관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미리 인지해 주었으면 한다.

Ⓒ픽사베이

피그말리온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속해 있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창착물인 아름다운 여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 조각상은 살아있는 여인이 되고, 그렇게 피그말리온의 사랑 이야기는 다시없을 해피엔딩인 것처럼 보인다. 간절히 바라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아마도 그 행복은 인간의 눈을 가릴 것이다.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대상은 정작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할 만큼, 실험자는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이미 실험집단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원하는 대로 나온 결과에 만족하며 실험을 닫아버릴 것이다.

피그말리온 효과가 나왔으니 반드시 거론하고 넘어가고 싶은 책이 한 권 있다. 구병모 작가의 <피그말리온 아이들>이라는 책인데,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외딴 섬에 고립되어 불우한 아이들을 데려가 어린 시절부터 키우는, 단 한 번도 세상으로 나오지 않은 학교가 하나 있다. 하지만 PD로서 취재를 하러 간 주인공의 눈에 들어온 그 학교는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통제되고 감시당하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상황 아래에 놓여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세뇌당한 대로 학교와 교장을 찬양할 뿐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실험자인 ‘교장’의 욕망이 투여된, 오염된 실험집단이었던 것이다. 오염된 실험집단으로부터는 원하는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주인공은 아이들에게 무언가 잘못됐다고 말하길 시도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책은 끝이 난다.

필자는 한국사회 또한 오염된 실험집단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의 욕망이 투여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잃어버린, 잘못된 실험집단.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가 아닐지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과거에 연예인 연습생이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너무 어린 시절부터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다 보니 스스로 계획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아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연습생을 그만두고 나서는 한동안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더랬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비단 아이돌 연습생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국사회는, ‘유난스럽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회이다. 어려서부터 유난스럽게 많이 공부하고, 유난스럽게 성공에 집착하고, 유난스럽게 공동체주의를 선호하며, 유난스럽게 어딘가에 소속되고 통합되기를 추구하는 굉장히 유난스러운 집단. 그것이 한국사회라고 생각한다. 이 유난스러운 사회 자체가 바로 실험집단인 한국사회 구성원을 통제하고 실험하는 실험자이다. 실험자의 유난스러운 욕망은 실험집단에게 그대로 투여되었고, 실험집단은 아무것도 아닌, 다만 실험자의 욕망대로 움직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최근의 한국 사람들을 보면, 자기 비하와 자책이 참 심한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을 빌어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오염된 실험집단 속 또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한 마디의 위로를 건네고자 한다. 실험에 임함에 있어, 실험집단이 오염된 것을 누구도 실험집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이는 지극히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실험집단에 대하여 객관적인 태도를 지키지 못한 실험자의 잘못이 더 크다. 그러므로 힘든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 오히려 우리를 통제하고 실험자의 욕망이 과도하거나 잘못된 욕망은 아니었는지, 그것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그말리온 아이들>에 등장하는, 완벽하게 통제된 채로 결국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처음에는 우스웠다.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내 웃음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 같다는 의심을 가지고도 그 벽을 깨고 나가지 못한다면, 우린 여전히 멀리서 보기에 웃음이 날 뿐인 상황 속에 갇혀 있게 되는 것이다.

윤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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