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돌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Orostachys margaritifolia Y.N.Lee

Ⅰ.

진주라 천 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면서/ 옛 노래를 불러본다

<‘진주라 천 리 길’ 중에서>

1980년대 중반, 일이 손에 익지 않은 사회 초년병 시절. 정신없이 일과를 마치면 부서 선배들이 돌아가며 저녁 겸 소주 한잔을 사줬습니다. 간간이 부장도 합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쯤 나이 차가 나던 부장은 얼큰하게 술이 오르면 으레 구성진 목소리로 낯선 대사를 읊곤 했습니다. “진주라 천 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생각해보니 요즘 랩 하듯 읊조림을 시작했지만, 끝까지 노래를 부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41년 발표된 신가요 ‘진주라 천 리 길’. 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에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 리 길’은 서정적이고 단정한 가사와 조화를 이룬 곡조로, 진주를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필명 이가실과 이운정의 실제 인물인 조명암과 이면상이 북으로 가고 가수 이규남마저 납북되면서, 1952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40년이나 금지곡으로 묶였습니다. 한 세대 나이 차이가 났던 필자에게 노랫말이 낯설고, 고향 진주를 그리워하던 부장이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진주 남강 물 가둬 만든 진양호를 굽어보는 자리에 진주바위솔 한 송이가 오뚝 서 있다. Ⓒ김인철

Ⅱ.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 가라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가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는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진주난봉가’ 중에서>

1970년대 후반 지겹던 교복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대학생이 되었지만 때는 정치적 암흑기인 유신 말기. 당시 골수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많은 대학생이 ‘타박네야’니 ‘진주난봉가’니 하는, 이른바 ‘민중가요’를 함께 부르곤 했습니다. 기성의 대중가요를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 부르다간 삶마저도 체제 순응의 늪에 빠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을 겁니다. 가난한 집에서 시집살이하던 여인이 기생첩과 희롱하는 남편을 보고 목매 죽자 남편이 뒤늦게 후회한다는 내용의 진주난봉가. 왜장을 유인해 남강에서 순국한 의기 논개 이후 다시 만난 진주는 이렇듯 서럽고도 애달픈 삶을 사는 아낙네의 고장이었습니다.

꽃 못지않게 예쁜 잎이 촘촘히 빙 둘러 난 진주바위솔의 전형적인 모습. 그리고 꽃대가 달리기 전 동아(冬芽) 상태의 진주바위솔. Ⓒ김인철
Ⓒ김인철

Ⅲ.

2019년 11월 7일. 서울에서 ‘천 리 길’ 떨어진 진주에, 그 유명한 진주 남강 물 가둬 만든 진양호 바위 절벽에 특별한 바위솔이 자생한다는 말에 길을 나섰습니다. ‘진주라 천 리 길’과 ‘진주난봉가’ 두 노랫말에 모두 등장하는 남강을 만나러 떠났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나타난 실제 거리도 360여㎞를 찍으니 ‘천 리 길’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경남 진주 인근 및 산청 등 지리산 자락에 자생하는 진주바위솔. 서울 및 경기·강원 지역의 바위솔이나 좀바위솔, 포천바위솔, 정선바위솔 등은 이미 꽃이 폈다 진 지 오래건만, 10월 하순 펴서 11월 중순 이후에도 꽃송이를 유지한다니, 천 리 길이 진주바위솔의 개화 시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가 싶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물이 넘실대는 바위 벼랑 여기저기에 진주바위솔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진주바위솔은 꽃 못지않게 예쁘고 독특한 잎으로 눈길을 끕니다. 바위에 납작 붙은 잎이 꽃차례가 모두 성숙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로제트형, 즉 장미꽃 조각처럼 둥근 방사상 배열을 갖추고 있습니다. 잎 하나하나는 길이 1~3.5cm, 너비 0.5~1.5cm의 주걱 모양인데, 가운데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왔습니다. 색은 녹색 바탕에 자장 자리와 끝은 자주색입니다.

가지를 치지 않아 하나의 개체에 하나의 꽃차례가 달리는데, 그 길이가 5㎝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 이상 긴 것도 상당수 눈에 띕니다. 하나의 꽃차례에 100여 개의 자잘한 꽃이 다닥다닥 달리는데, 1㎝ 미만인 개개의 꽃마다 5장의 꽃잎과 5개의 암술, 그리고 자주색 꽃밥이 달리는 10개의 수술이 있습니다. 꽃차례나 개개 꽃의 형태는 다른 바위솔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주낭군’이 붓글씨 배울 적에 썼음직한 백모필(白毛筆)을 똑 닮은 진주바위솔. 바위 중앙에 납작 붙어서 자라고 있다. Ⓒ김인철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절벽 위 안전지대에서 풍성하게 꽃을 피운 진주바위솔. Ⓒ김인철

모든 바위솔이 바위나 그에 버금가는 곳에서 자라기에 접근이 쉽지 않지만, 진양호반에 피는 진주바위솔의 위험성은 손에 꼽을 만합니다.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포천바위솔을 빼고, 가장 험한 곳에 자생한다고 할 만합니다. 바위라고는 하나, 조금만 힘을 가하면 부스러지는 석회암인 데다 그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여서, 아차 하는 순간 바위 벼랑에서 물속으로 직행할 위험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며 물러섰습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나뭇잎은 붉게 물드는 가을 진양호 둘레 절벽 위에 진주바위솔이 멋지게 피어 있다. Ⓒ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opiniontimes.co.kr)도 보장합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