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31]

[논객칼럼=김부복] 고구려에 ‘경관(京觀)’이라는 건축물이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건축물이었다. 경관은 수나라 113만 침략군을 무찌른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적군의 뼈와 유골을 쌓아올리고 만든 건축물이었다. 따라서 위대한 ‘승전 기념물’이었다. ‘탑’ 모양의 건축물이었다고 하니 ‘경관대탑’이었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을 지휘한 명장이었다. 30만5000명의 수나라 군사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2700명에 불과했다. 생존자가 2700명에 불과했다는 것은 단 한 판의 싸움에서 99% 이상의 군사를 잃었다는 얘기다.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승리였다. 이런 승리를 거두고 세운 것이 경관이었다.

그 경관의 규모는 기록에 없다. 하지만 거대한 규모였음은 ‘경관’이라는 글자로도 알 수 있다. 경성(京城)이 한 나라의 가장 큰 성곽도시를 의미하듯, 경(京)은 가장 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관이 세워졌던 위치도 알 수 없다. ‘서울 경’이라는 글자로 평양성 근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어쨌거나 경관은 고구려의 영광이었다. 고구려의 정신이고 자부심이었다. 고구려의 국력을 과시하는 상징이었다. 주변국들은 경관을 세운 고구려의 힘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픽사베이

경관은 안으로는 백성을 단합시키는 건축물이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경관을 ‘현장체험’하면서 고구려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배우고 느꼈을 것이다. 고구려는 상무정신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다.

당연히 온갖 시와 노래와 춤으로 경관을 찬양했을 게 분명했다. 고려 때 이색(李穡∙1328∼1396)이 ‘정관음(貞觀吟)’이라는 시로 이세민이 안시성 싸움에서 눈알을 잃은 사실을 읊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진양공자가 장수들과 결의할 때(晉陽公子結豪客)/ 풍운의 장쾌함은 온 우주에 기세 가득하더니(風雲壯懷滿人極)/ 중략 / 주머니 속 물건인양 큰소리치더니(謂是囊中一物耶)/ 어찌 알았으랴. 검은 눈동자 흰 깃에 떨어져버릴 줄을(那知玄花落白羽).”

‘진양공자(晉陽公子)’는 이세민의 태자 때 이름이고, ‘현화(玄花)’는 검은 눈알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랬는데, 고구려가 경관을 찬양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전해지는 게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고구려는 당당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즉위 이듬해인 628년 돌궐의 힐리칸(頡利可汗)을 생포하자 고구려 영류왕(榮留王)은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봉역도(封域圖)’를 전달했다.

봉역도는 고구려의 통치권이 미치고 있는 영역의 지도다. 두 나라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두자는 의미에서 전달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훗날 봉역도를 ‘바쳤으니’ 당나라에 대한 충성의 표시라고 우겨댔다. 봉역도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은 군사기밀을 넘겨주는 것과 같은 매국적 행위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봉역도는 경관과 함께 ‘강대국’ 고구려의 영역을 확실하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게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이 경관을 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보고 격분, 위령제 지내고 나서 허물었다고 했다. 그랬을 리가 없었다. 고구려는 당나라가 경관을 훼손할 정도로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에 경관이 허물어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경관은 당나라 사신과 수행원 따위가 허물어버릴 규모도 아니었다. 고구려는 모든 건축물이 어마어마했다. 아마도 당나라는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경관의 흔적을 지워야 했을 것이다.

경관을 없애버린 이유도 쉽다. 고구려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고구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찬란했던 과거사’가 1000년 후 ‘치욕의 과거사’로 나타나고 있다. 왜란 때 왜병이 조선 사람들의 코를 베어가서 만든 ‘코무덤(鼻塚)’이다.

왜병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지시로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기를 갓 낳은 산모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산모의 코를 잘랐다. 옆에 누워 있던 갓난아이의 코마저 베어갔다. 산모와 아기는 피투성이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베어간 코를 한꺼번에 묻었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12만을 넘었다.

도요토미는 조선 지도에 색칠을 해서 점령계획을 세웠다. 전라도에는 빨간색을 칠했다. 경상도에는 하얀색을 입혔다. 전라도를 ‘적국(赤國)’, 경상도를 ‘백국(白國)’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전라도를 점령하는 게 색칠하듯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요토미는 정유재란을 도발했을 때 이렇게 지시하기도 했다.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가는 것은 전라도 사람의 집단행동 때문이다. 전라도 사람이 가장 심하게 저항하고 있다. 우선 전라도로 진격해서 일시에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라.”

코무덤은 높이가 5m 정도 되는 대단히 큰 무덤이라고 한다. 무덤 위에는 오륜탑이라는 3m 정도의 석탑이 세워져 있다. 석탑을 세운 이유는 조선 사람의 원혼을 누르기 위해서라고 했다.

코무덤 근처에는 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를 기리는 도요쿠니(豊國) 신사를 만들었다. 조선 사람의 원혼이 떠도는 옆에서 극락왕생하겠다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코무덤의 이름이 ‘귀무덤(耳塚)’으로 바뀌었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이라는 유학자가 그 이름이 지나치게 야만적이라며 귀무덤이라고 고쳤다고 했다. 그것보다는 자기들의 만행을 덮어보려는 얄팍한 꼼수일 것이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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