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사진작가의 14,400km의 여정] 첫 유라시아 ‘우리 꽃’ 기행(上)

북방계 식물의 본향(本鄕)을 가다

시베리아는 한반도에서 사라져 가는 북방계 식물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다. 북방계 식물은 한마디로 아한대(亞寒帶), 즉 북위 40도 이상이 고향인 식물이다. 북극권 아래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부 지역이 아한대에 해당한다.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어 추위가 심한 것이 기후적 특징이다.
한반도에서는 평북과 함경도가 아한대에 속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북방계 식물은 이들 지역 외에도 멀리 제주도에까지 서식하고 있다. 가깝게는 만 년 전, 멀게는 수억 년 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빙하기 때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의 북방계 식물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폭넓게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이후 기온이 오르면서 한반도 내 북방계 식물이 대부분 멸종됐고, 현재는 수백 종만이 설악산과 한라산 등 높은 산 정상부나 기온이 낮은 골짜기 등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인천공항을 떠나 세 시간 만에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는 짙푸른 밤하늘이 인상적인 항구 도시였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도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러시아 동방정책의 실천을 위한 첨병 도시다. 그리고 그 일대는 우리에겐 연해주(沿海州)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50만 고려인의 애환이 서려 있는 땅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달리는 9,288㎞ 철로 주변은 ‘지구상 최대의 꽃밭’이다. 열차와 자작나무 사이, 그곳은 분홍바늘꽃과 솔나물, 터리풀 등 숱한 야생화가 만발한 천상의 화원이다. Ⓒ김인철

자주방가지똥, 좁은잎해란초 첫 대면

유라시아친선특급 참가단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순국선열을 참배하고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첫 일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유적지의 하나인 이상설(1870~1917) 선생 유허비 부근에서, 산림청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국생종)에 등재된 ‘우리 꽃’ 자주방가지똥을 처음으로 대면했다. “부전고원에서 백두산 지역을 거쳐 그 북쪽 지방에까지 분포”한다지만, 그간 한반도 내 자생지인 북한 지역을 갈 수 없어 만나지 못했다.
유허비는 바로 쑤이펀 강(발해사를 통해 우리 귀에 익은 말로 솔빈강) 가에 있었고, 그 주위는 온통 노란색과 보라색 꽃이 물결치는 초원이었다. 남한에도 흔한 털솔나물과 벳지였다. 막 피기 시작한 구릿대는 물론 까치수염과 층층이꽃도 만났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해발 214m 독수리전망대에도 올랐다. 솔직히 남산(265m)보다도 낮은 언덕에 뭔 볼거리가 있을까 심드렁했는데, 곧 또 다른 행운을 누렸다. 역시 북방계 식물로서 평북 선천과 의주, 함북 경성이 자생지인 ‘우리 꽃’ 좁은잎해란초를 만난 것. 남한에서는 국립수목원 등에서 인위적으로 재배할 뿐, 자생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유럽 원산의 귀화식물로 분류되는 잔개자리와 붉은토끼풀, 큰뱀무가 좁은잎해란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장구채류 식물도 만났다.
선로 사이사이 모래와 자갈밭에서도 야생화들은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해 꽃을 피웠다. 특히 좁은잎해란초는 줄기차게 노란색 꽃을 많이도 피웠다. 바이칼 호숫가에서는 2m가 넘게 자라기도 했지만, 선로 주변에선 10~20cm 크기로 적응해 살아가고 있었다.
어디선가부터 선로 사이 자갈밭에, 선로 밖 풀밭에 키 작은 풀이 흰색 또는 갈색의 수염을 날리고 있다. 키 20~50cm 안팎의 은발 물결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백두산에 자란다는 ‘우리 꽃’ 황새풀 또는 애기황새풀인가 했는데, 확인해보니 긴까락보리풀이다. 영어 이름으로 ‘여우꼬리보리풀(Foxtail Barley)’이다. 황새 쫓다 여우에 홀린 기분이다.

북한 지역에도 자생하는 자주방가지똥. Ⓒ김인철
바이칼 호숫가에 핀 좁은잎해란초. Ⓒ김인철
철길 사이에 핀 긴까락보리풀. Ⓒ김인철

속단·금불초·층층잔대·애기똥풀… 치타역 앞동산의 야생화

열차가 멈춰 선다. 치타역이다. 역 앞에 작은 동산이 보인다.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그간 차창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분홍바늘꽃에 다가선다. 그 옆에 층층잔대도 보인다. 친숙한 애기똥풀도 한 무더기 피었다. 흰전동싸리와 시호·서양톱풀·장구채도 눈에 들어온다.
속단도 여럿 있다. 노란색 꽃이 있어 민들레인가 살펴보았더니 금불초다. 금불초는 이후 차창 밖 평원에 간간이 노란색 꽃무늬 수를 놓을 만큼 군락을 이루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 호숫가에 분홍바늘꽃이 활짝 피어 있다. Ⓒ김인철
남한에서도 흔히 자라는 금불초. Ⓒ김인철

여름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야생화 천국 열차’

한여름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철로변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수채화처럼 피어나는 환상의 ‘야생화 천국 열차’였다.
열차의 안전을 위해 선로에서부터 최소한 수십m, 길게는 2~3km까지 개활지로 유지·관리하기 때문에 철길 주변은 그야말로 야생화들이 맘껏 꽃피울 수 있는 ‘천상의 화원’이 되는 것. 열차는 자작나무와 잣나무, 적송, 그리고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림이 울창한 타이가 지대와 끝없는 초원이 펼쳐지는 스텝 지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하얀 피부 미인을 닮은 자작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섰고, 노랑·파랑·분홍의 꽃 무더기가 군데군데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졌다. 동틀 무렵 열차가 강변이나 호숫가, 늪지대를 지나게 되면 뭉게뭉게 피어나는 물안개가 몽환적 새벽을 선물로 내민다.

끝도 없이 늘어선 백색의 피부미인 자작나무. Ⓒ김인철

자작나무와 분홍바늘꽃 사이 

“저기 창밖에 보이는 키 큰 분홍색 꽃이 뭐죠?”
차창 밖에 끝도 없이 피어있는 분홍색 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너나없이 묻는다. 그렇다. 여름 시베리아 벌판의 주인은 자작나무도 푸른 평원도 아닌, 분홍바늘꽃이었다. 열차를 탄 누구나 그 이름을 궁금해할 만큼 철길 내내 분홍의 꽃물결이 이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에 끝도 없이 펼쳐졌다.
국내의 경우 강원도 태백 지역이 남방한계선으로 대관령 등 몇몇 지역에서 수십에서 수백 포기 정도 자생하는 게 전부인 분홍바늘꽃이 철로와 자작나무 숲 사이 풀밭에서 간단없이 피고 진다.
사실 분홍바늘꽃은 유라시아뿐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의 비슷한 위도에도 광범위하게 분포해,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유일한 꽃이라 할 수 있다. 1.5m 안팎으로 키가 클 뿐더러 분홍의 꽃 색도 화사하다. 꽃이 진 뒤 맺는 씨방이 바늘처럼 길다 해서 ‘바늘꽃’이란 이름이 붙었다.
분홍바늘꽃이 스텝과 타이가 숲 곳곳에 분홍색 꽃물결을 만들고 지나가고 나면, 그다음엔 솔나물이 노란색 꽃의 바다를 만들고, 이어 터리풀이 솜을 풀어놓은 듯 흰색의 꽃구름을 수놓는다. 개구릿대와 궁궁이, 어수리로 추정되는 키 큰 산형과(繖形科) 식물들이 길게 늘어서 열병하듯 인사하고, 큰조뱅이·꽃쥐손이류 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한다.  

                             쑤이펀 강가에 핀 구릿대. Ⓒ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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