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늘의 하프타임 단상 21]

[오피니언타임스=최하늘] 한 아이가 세 살 때 대학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고 12년을 휠체어에 앉아 살았다. 뇌성마비는 뇌 손상으로 운동기능이 마비되는 질환이다. 어느 날 물리치료사가 그의 증세를 보고 뇌성마비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검사해보니 소량의 도파민 약물로도 치료 가능한 세가와병이었다. 약을 먹은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이는 제 방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아빠, 나 이제 걷는다!”

사람들은 이 상황이 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와 부모는 먼저 감사해한다. 고생하며 지난날들에 대해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았으리라. 남의 일 같지 않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주위에도 이런 일들이 없지 않다. 얼마 전 내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피부가려움증에 시달린 지 10년이 넘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게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린다. 밤만 되면 가려움증이 도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자다 일어나 항히스타민제를 먹거나 스테로이드 크림을 바르고 나서야 다시 눕는다. 어쩌다 한번이 아니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그랬다.

이사하고 나니 그동안 다니던 병원이 너무 멀어 집에서 가까운 데를 찾았다. 고질병이니 진찰할 것도 없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레르기성 피부염’이라고 자진 신고했다. 그동안 만난 여러 의사가 내린 진단이었다.

Ⓒ픽사베이

젊은 개업의는 거기에 맞춰 먹는 약과 바르는 약을 처방했다. 그리고는 조금 아쉬웠던지 3만 원 하는 보습제 하나를 추가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기도 뭐해 받아왔다.

사실 어떤 기대도 없었다. 대학병원에서도 근본적 치유는 안 된다고 했다. 가려울 때마다 약을 먹거나 발라 증세를 완화하는 게 최선이라 여기며 살아온 지 10년이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특별한 기대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보습제만 발랐는데 그토록 나를 괴롭힌 가려움증이 사라졌다. 벌써 두 달 넘게 편히 잔다. 의사들이 치료를 포기한 ‘난치성 피부질환’이 단순히 수분부족 때문이었단 말인가? 어찌했든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웃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

얼굴과 목덜미에 문제가 있어 피부과를 찾은 것은 50대 초반 때였다. 중년의 여의사는 다양한 진단과 처방을 내놓았다. 처음엔 햇빛 알레르기를 의심했고, 다음 용의 선상에 올린 게 화장품 알레르기였다. 몇 달을 찬물로 세수했고, 로션도 바르지 않았다. 얼굴 피부는 더 엉망이 됐다. 결국은 내가 치료를 포기했다.

그다음 찾은 곳은 한의원. 30대의 애 띠어 보이는 여의사가 진료했다. 그는 “이런 피부질환은 몸에 찬 독소 때문에 생기니 독소를 제거하면 된다”고 했다. 독소 제거를 위해 매일 수십 대의 침을 놓고, 염소똥 같은 환약을 한 줌씩 먹였다. 침을 발가락과 손가락 끝에도 놓아 비명이 절로 나왔다.

증세가 쉽게 호전되지 않자 의사는 환약의 용량을 점차 늘려나갔다. 나중에는 정량의 몇 배 되는 약을 먹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치고 말꺼에요”라고 했다. 나는 거의 실험용 생쥐였다.

그날 밤 나는 창자가 끊어져 죽는 줄 알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방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란 아내가 119에 전화했고, 나는 생전 처음 119구조대 신세를 졌다. 집에서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이 불과 700m인데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이번엔 대학병원엘 가봤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진단결과는 ‘원인을 알 수 없음’이었다. 대증요법으로 반년 치 먹을 약과 바르는 약 10여 통을 챙겨왔다. 이후로는 병원에 가더라도 아예 치료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변이 생긴 것이다.

얼마 전 한 종편방송에서 본 건강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사람이 나이 먹으면 피부의 수분이 줄어 가려움증이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나이대별 출연자들의 피부 수분 정도를 즉석에서 검사해 보여줬다. 전문가는 젊은 피부의 수분지수는 20% 정도지만 중·노년층이 되면 그것이 10% 정도로 줄어 가려움증을 유발한다고 설명했다.

옛날 노인네들이 잠잘 때 머리맡에 효자손을 갖다 놓는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이제 내 얘기가 됐다. 아무튼, 다행이다. 그동안 내가 가려움증 약을 먹을 때마다 아내가 여간 걱정한 게 아니었다.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그 약이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설명하는 데 긴 시간을 할애하곤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이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는 이 일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정말 수분부족 때문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고생한 것일까? 그렇다면 만인의 상식을 정작 전문가인 의사들이 왜 무시해 버렸을까? 아니면 처음엔 원인 불명의 알레르기였다가 어느 순간 자연 치유되고, 내 피부가 늙어가면서 수분부족 현상이 새로 생긴 것일까?

“그러려니 하고 살아라.” 혼자 낑낑대다 자신에게 던진 말이다. 원래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즘 좋아하게 됐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적당히 타협하자는 얘기 아니다. 내 안에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를 때 그것에 매이지 않고 통과시켜버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준 선물이다.

이제 인생 후반기로 들어서니 싫건 좋건 병원 가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평생 그럴 일 없다면 좋겠지만, 자세한 검사가 필요해 종합병원에 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몇 번 안 가봤지만, 어쩌다 그런 큰 병원 갔다가 마음이 불편해진 경험도 있다.

최근 시내버스 운전사가 정류장에서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차에서 내리던 70대 할머니가 넘어져 뒷바퀴에 깔린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이 있었다. 버스 운전사들은 터무니없이 잦은 배차와 짧은 휴식시간 등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난폭운전을 하지 않으면 밥 먹을 시간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처한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난폭운전이 아예 몸에 배어 버린 시내버스 운전사가 전체의 5%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의 배경을 취재하다 보게 된 시내버스 운전사의 모습에 우리나라 종합병원 의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내 무지한 까닭일 것이다.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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