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늘의 하프타임 단상 22]

[오피니언타임스=최하늘] 흔히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말한다. 20대에는 시속 20㎞였던 세월의 속도가 60대에는 시속 60㎞로 빨라진다고 했다. 해를 더할수록 발자취로 남길만한 일들이 줄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겅중겅중 걷다 보니 금세 한 해의 끝자락이다.

그런데도 아직은 이를 인정하려 않는 자신을 본다. 기억될 만한 일들이 특별히 많아 그런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 마음이 바뀌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삶에서 만나는 작은 것들조차 의미를 안고 다가온다. 이것이 쏜살같은 세월의 걸음을 조금이나마 늦추지 않나 싶다.

한 해를 돌아본다. 인생의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서 철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삶의 환경이 달라진 데 맞춰서 일, 건강, 여가, 사회공헌, 공동체 등을 재설계했다. 후반기에 변화가 필요한 것들이었다. 마음에 두고 있던 것들이 어느 정도 실현됐으니, 제법 잘 걸어온 셈이다.

Ⓒ최하늘

그런데 오다 보니 더 중요한 게 눈에 띈다. 남은 생이 행복하려면 먼저 ‘걱정하지 않는 법’과 ‘천천히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내 영혼이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로움은 나이 듦의 특권이다. 70대 중반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꼽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일이다. 인간생태학 권위자인 칼 필레머 코넬대 교수가 미국 내 각계각층의 70~100세 어르신 1000여 명을 만나 물었다. “살아오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이들이 빼놓지 않고 한 말이 있었다. “걱정 좀 덜 하고 살걸” “온갖 걱정 다 하고 살았던 게 후회돼”

칼 필레머는 그들을 ‘인생 현자(賢者)’라 칭한다. 그는 이들의 말을 취합한 저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에 이렇게 적었다.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 일을 걱정하느라 현재를 독살하는 행위를 당장 멈춰라.”

누군들 독약을 마시고 싶어하겠나. 하지만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듯, 여기저기서 튀어 오르는 근심 걱정을 잡아 누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삶의 질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근심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불안의 근원인 미래는 내가 통제 가능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쓸데없이 걱정하는 버릇이 많이 사라졌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나의 하나님께 맡겨드린다. 때로는 염려가 슬그머니 찾아오지만 내 안에 둥지를 틀기 전에 쫓아낸다.

올 한해는 천천히 걷는 법을 익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평생을 헐레벌떡 살아오다 보니 조용히 걷는 게 어색하다. 적막함이 주는 불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젠 거실 창으로 흘러드는 햇살을 느긋이 즐길 줄도 알게 됐다. 작은 이슬방울에 감사하며 낙타를 타고 천천히 광야를 건너는 게 인생이란 것을 깨우친다.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천천히 걷는 것은 내 안의 갈망을 바꾸는 것이기도 했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이 바뀌는 것이었다. 땅에서 눈을 돌려 하늘을 본다.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스민다. 나를 얽어매던 것들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않고 내 눈이 높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큰 일들과 나에게 벅찬 일들을 행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내가 내 영혼을 가만히 잠잠히 있게 하니,
젖 뗀 아이가 그 어미와 함께 있는 것 같고
내 영혼도 젖 뗀 아이 같습니다.

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히 여호와를 바라라. (시 131)

새로운 공동체와의 만남은 큰 기쁨이다. 앞으로 내가 실질적인 관계를 갖고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될 사람들이라고 본다. 나의 후반기 삶을 아름답게 색칠해주고 더욱 풍성하게 해 줄 공동체들이다.

누구나 인생의 시즌이 바뀌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일로 맺어진 공동체의 의미는 퇴색하고, 삶의 의미를 더해줄 공동체가 필요해진다.

Ⓒ최하늘

어느 통계를 보니 인생 후반기에 있는 사람들이 갖는 공동체 수가 평균 8개 정도였다. 가족공동체를 기본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출신학교 공동체, 지역공동체, 취미공동체, 신앙공동체 등이 주를 이룰 것이다.

올해 들어 일을 주 24시간 재택근무로 전환하고 나니 시간과 마음에 제법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자주 나가지 못했던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 가서 새롭게 만난 몇몇 공동체가 삶에 활력을 더한다. 행복감을 안겨준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에게 고교동기 S군이 강추한 등산모임 ‘용천회’가 그중 하나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가까운 산에 오르는데, 많이 기다려진다. 아직 몇 차례 안 됐지만, 약속일 전날이면 잠을 설친다. 국민학교 소풍 전날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고교시절부터 함께 노래한 친구들의 합창모임 Y-glee와의 만남은 나에게 축복이고 행운이다. 특별히 영혼이 맑은 친구들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수학 퀴즈 하나를 내놓고 종일 답을 구하며 즐기는 그들이 경이롭다. 연습한다고 생각지 말고 모여 소리를 만들고 함께하는 것을 즐기자고 한 지휘자 L군의 말이 포근하게 다가온다. 얼마 전 회원인 P군의 자녀 결혼식에서 20명이 함께 축가를 부른 것은 큰 감동이었다.

Ⓒ최하늘

고등학교 동기들의 지역 모임인 ‘동용회’도 즐겁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친구들과 만나 사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얻는다. 졸업 후 몇십 년 만에 보는 친구도 전혀 서먹하지 않은 게 신기하다. 누군가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교적은 못 바꾼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럴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자리 잡은 중학교 동창 모임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고향이 있어서 좋다. 그리운 고향산천이 이제 많이 변해버렸으니, 사람에게서 그 흔적을 찾는다.

연초부터 꼭 한군데 가입하려고 마음먹었던 게 신앙공동체인데,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다른 공동체들은 나 혼자 들어가면 되는데, 신앙공동체는 부부가 함께 참석한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조심스럽다. 새로운 사귐 속에서 더욱 풍성해질 삶을 기대한다. 

Ⓒ최하늘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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