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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어둠을 밝힌 가수 박향림[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01.03 15:35

[논객닷컴=이동순]

여러분께서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영화의 주인공, 미남 배우 장동건과 원빈이 함께 엮어 갔습니다. 그 영화에서 두 사람의 행복했던 시절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배경음악도 함께 기억하시는지요? ‘오빠는 풍각쟁이야, 머, 오빠는 심술쟁이야, 머…"라는 재미난 가사로 펼쳐지는 소녀풍의 간드러진 목소리는 바로 박향림(朴響林)이라는 1930년대의 인기가수였답니다. 그녀가 불렀던 '오빠는 풍각쟁이'란 당대의 히트곡이지요.

오빠는 풍각쟁이야이 뭐 /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몰라이 난 몰라이 / 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 /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구

오빠는 욕심쟁이 / 오빠는 심술쟁이 / 오빠는 깍쟁이야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뭐 /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싫여이 난 싫여이 / 내 편지 남몰래 보는 건 난 싫여이

명치좌 구경 갈 때 혼자만 가구 / 심부름시킬 때면 엄벙땡 하구

오빠는 핑계쟁이 / 오빠는 안달쟁이 / 오빠는 트집쟁이야

 

오빠는 주정뱅이야 뭐 / 오빠는 모주꾼이야 뭐

난 몰라이 난몰라이 / 밤늦게 술 취해 오는 건 난 몰라

날마다 회사에선 지각만 하구 / 월급만 안 오른다구 짜증만 내구

오빠는 짜증쟁이 / 오빠는 모주쟁이 /오빠는 대포쟁이야

-'오빠는 풍각쟁이' 전문

가수 박향림. 맨 왼쪽이 데뷔시절Ⓒ이동순
<오빠는 풍각쟁이> 가사지 Ⓒ이동순

빠른 비트와 랩을 즐기는 요즘 세대에게는 다소 낡은 느낌에다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까지 느끼게 하지만 코믹한 가사와 흥겨운 리듬은 그들의 감각에도 즐거움을 주었고, 심지어 노래방 애창곡으로 떠올려지기도 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수십 년 전에 활동했으며 그동안 완전히 잊힌 가수가 무덤 속에서 다시 환생하여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형국이니 말입니다.

가요는 그 시대 주민들의 마음속 풍경을 고스란히 대변해준다고 합니다. 슬픔이면 슬픔, 기쁨이면 기쁨의 감정을 노래 속에 곡진하게 담아서 그 시대 사람들보다 먼저 대신하고 위로하며 고통을 분담해 줍니다. 그러므로 가요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작사가, 작곡가, 가수는 언제 어디서든 대중들의 눈빛과 마음을 기민하게 먼저 읽어야 하겠지요.

이제는 흘러간 일제강점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어디에도 호소할 곳조차 없던 시절, 당시 우리 겨레는 가수의 노래를 유성기로 들으며 한과 쓰라림을 달랬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박향림은 깜찍하고 발랄한 음색과 당돌함이 느껴지는 창법으로 어둡고 우울하기만 했던 식민지의 어둠을 몰아내고, 잠시나마 밝은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었던 가수였습니다.

가수 박향림은 1921년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朱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박억별입니다. 주을은 일찍이 조선 중엽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지였습니다. 함경선의 주을 역에서 북서쪽으로 13㎞ 지점에 주을온천이 있다지요. 북쪽으로 연두봉(蓮頭峰 952m), 남쪽으로는 청계봉(淸溪峰 551m)이 솟아 있고, 이 사이의 비교적 평탄한 평야 지대에 주을온보(朱乙溫堡)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온천 마을에서 작은 식당을 경영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분명하고 또랑또랑한 성격의 함경도 소녀 억별은 좋은 학교가 많이 있는 원산으로 내려가서 루씨여자고보를 다녔습니다. 졸업한 뒤에는 요즘의 은행에 해당하는 금융조합에 취직해서 잠시 다니기도 했습니다.

억별의 나이 16살 되던 1937년, 주을온천에는 온통 서울에서 온 오케연주단(조선악극단)의 신명나는 연주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이런 연주단이 도착하면 다음 날부터 대표 출연진을 앞세워 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니며 선전을 했었는데, 주민들은 가슴이 설레어 그 뒤를 줄곧 따라다니곤 했답니다. 이를 일본말로 ‘마찌마와리’(町廻)라 했습니다. 억별은 오케연주단의 마찌마와리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공연을 다 본 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무대 뒤로 작곡가 박시춘을 대뜸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류가수가 되어서 효도를 하고 싶어요.”

이를 갸륵하게 생각한 박시춘은 그 자리에서 우선 노래 솜씨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약간 동그스름한 얼굴에 커다란 쌍꺼풀 눈이 귀염성스러웠던 박억별은 목소리도 마치 은쟁반에 옥을 굴리는 듯해서 박시춘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오케연주단 이철 단장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오케레코드사엔 이미 이난영, 장세정, 이은파 등을 비롯한 최고 여성 가수진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담에 서울 올 일이 있으면 한번 들리거라.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이 말은 거절의 뜻이었지요. 그런데도 이 말을 굳게 믿었던 억별은 그해 가을 바로 서울의 오케레코드사를 찾아가서 이철 사장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이에 실망하고 화가 치민 억별은 태평레코드사를 찾아가서 오디션까지 받고 즉시 채용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16세의 소녀 가수였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박억별은 '청춘극장'과 '서커스 걸'이란 노래를 태평레코드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 선생으로부터 받아서 첫 데뷔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풍부한 성량에다 무언가 답답한 속을 확 트이게 하는 야릇한 매력이 있었으므로 대중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때 음반에 표시된 이름은 박정림(朴貞林)이었습니다.

'막간 아가씨' 신보소개Ⓒ이동순

이후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또 다른 히트곡으로는 ‘울고 넘는 무산령’  ‘봄 신문’  ‘막간 아가씨’ 등이 있습니다. 특히 ‘막간 아가씨’는 서커스단, 혹은 이동악극단에서 일하는 떠돌이 소녀의 애달픈 삶과 운명을 노래하여 많은 가요 팬들의 슬픔과 서러움을 자아내었습니다. 이 노래에는 깡깡이라는 이름의 바이올린, 색소폰, 실로폰 등의 유랑극단 악기들이 실감 나게 소리를 들려줍니다.

여러 곡이 히트하게 되자 박정림은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전격 스카웃됩니다. 이때부터 함경도 소녀 박억별은 박정림을 거쳐 박향림이란 예명의 인기가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무렵 많은 노래를 취입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히트했던 노래로는 단연코 '오빠는 풍각쟁이'가 아닐까 합니다. 소녀 가수 박향림의 어리광이나 투정을 부리는 듯한 느낌에다 간드러진 콧소리로 축음기에서 들려오던 이 노래는 무엇보다도 가사의 내용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코믹송입니다. 당시 서민들의 식생활과 삶의 구체성을 너무도 실감 나게 잘 반영하고 있는 좋은 노래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노래 가사에 떡볶이, 오이지, 콩나물 등의 음식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나 제나 우리 사회의 밑바닥 서민들이 항상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가사를 음미해보면 여동생을 괴롭히는 짓궂은 오빠를 ‘풍각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풍각쟁이는 원래 시장이나 집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돈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노래 가사에서는 심술쟁이 오빠를 대신하는 말로 쓰이고 있네요. 지금은 국립극장으로 바뀐 옛날의 일본식 극장 명치좌(明治座)도 등장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우리말인 모주꾼, 안달쟁이, 모주쟁이, 대포쟁이란 어휘들도 사뭇 정겹게 다가옵니다.

콜럼비아레코드 전속으로 있던 시기에 박향림은 ‘전화일기’란 만요(漫謠)를 김해송과 듀엣으로 함께 불러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노래 속에서 박향림은 전화교환수 역할로 특유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김해송은 이 전화교환수에게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서 은근히 수작을 걸고 추파를 던지는 건달로 등장합니다. 이에 대하여 박향림은 때로는 쌀쌀하게, 또 때로는 상대방을 야유하며 오히려 희롱하기까지 하는 여유를 부립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노래 가사에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3개 국어가 코믹하게 풍자적으로 뒤섞여 구사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콜럼비아레코드 전속 시절 박향림의 주요 히트곡으로는 ‘사랑 주고 병 샀네’  ‘그늘에 피는 천사’  ‘우리는 멋쟁이’  ‘봄 사건’  ‘기생아 울지마라’  ‘찻집 아가씨’  ‘선창에 울러 왔나’ 등입니다. 남일연, 신회춘 등과 남녀 혼성으로 부른 ‘타국의 여인숙’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구곡간장’  ‘인생주막’  ‘희망의 부르스’ 등도 콜럼비아 시절의 히트곡들입니다.

'기생아 울지마라' 가사지Ⓒ이동순

박향림 인기의 기세가 워낙 높아지니까 너무도 놀라면서 당황한 곳은 바로 지난날 제 발로 찾아왔던 박향림을 쌀쌀하게 거절했던 오케레코드사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가수들은 모조리 오케레코드사로 집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이철 사장의 욕심은 박향림을 기어이 오케로 이적(移籍)시키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예상치 못한 많은 이적료를 지불했을 테지요. 박향림이 오케레코드로 옮겨와서 첫 취입곡으로 발표한 작품은 그 유명한 '코스모스 탄식'입니다.

코스모스탄식 신보광고Ⓒ이동순

코스모스탄식 가사지Ⓒ이동순

이 노래에는 두만강 다리, 해란강(海蘭江), 용정(龍井) 역, 나진행(羅津行) 열차가 마치 흑백사진으로 보는 듯 선연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검은빛 증기기관차의 화통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눈에 보이는 것 같군요. 이 북방의 쓸쓸한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백의 동포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또 눈물로 애타는 가슴을 저미었던 것일까요.

북간도 용정역 표지판Ⓒ이동순

코스모스 피어날 제 맺은 인연도 / 코스모스 시들으니 그만이더라

국경 없는 사랑이란 말뿐이더냐 / 웃으며 헤어지던 두만강 다리

 

해란강에 비가 올 제 다정턴 님도 / 해란강에 눈이 오니 그만이더라

변함없는 마음이란 말뿐이더냐 / 눈물로 손을 잡던 용정 플렛홈

 

두만강을 건너올 제 울던 사람도 / 두만강을 건너가니 그만이더라

눈물 없는 청춘이란 말뿐이더냐 / 한없이 흐득이던 나진행 열차

-'코스모스 탄식' 전문

이후로 발표하는 음반마다 히트가 이어지자 이철 사장은 못내 흡족하고 흐뭇했습니다. 그렇게도 서울로 진출하여 훌륭한 가수가 되고 싶었던 박향림은 오케레코드사가 조직한 당대 최고의 조선악극단 중심 멤버로서, 그리고 대중들의 우상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박향림 음반사진Ⓒ이동순

이 시기 박향림이 즐겨 불렀던 노래의 특성은 다분히 도시적 감수성과 발랄한 정서, 함경도 억양이 느껴지는 정확하고도 야무진 창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가수들과 뚜렷하게 변별되는 이러한 개성이 가요 팬들에게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오케레코드 전속 시절, 박향림의 주요 히트곡으로는 ‘코스모스 탄식’을 비롯해서 ‘순정 특급’  ‘쓸쓸한 여관방’  ‘비에 젖은 화륜선’  ‘요즈음 찻집’ ‘해 저문 황포강’ ‘아름다운 화원’ 등입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연속으로 발표해서 그야말로 당시 가요계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가수 박향림의 인기는 오케레코드사에서 조직한 조선악극단 일본공연으로 계속 이어져 이난영, 장세정 등을 비롯한 대표적 여성 가수의 반열에 당당하게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인기가 집중되니 그로 말미암아 피할 수 없었던 것이 또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조선총독부의 요청에 따른 군국가요 음반녹음이었습니다. 

일제는 인기가수의 인기를 이용해서 지원병 정책이나 대동아공영권, 내선일체론 따위의 식민지 통치이념을 가요작품을 통해 슬그머니 전달하고 주입하려는 계획을 세웠지요. 남인수, 백년설, 이난영 등과 박향림도 여기에 강제 동원되다시피해 제국주의자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동원되어 불렀던 것이 1943년 조선징병제 실시를 기념하는 노래 ‘혈서지원’과 ‘총후(銃後)의 자장가’ 등입니다.

'항구에서 항구로' 등 가사지Ⓒ이동순

숨 막힐 것 같은 식민지 암흑의 시기를 박향림은 어렵게 버티어 나갔습니다. 일제 말에는 약초(若草)가극단, 예원좌 등의 악극단에서 활동을 이어가며 힘겨운 시기를 살았습니다. 드디어 1945년 감격의 해방을 맞이했지만 박향림은 여전히 악극단 가수로 활동하며 전국을 부평초처럼 떠돌았습니다. 고단했던 식민지 시대를 잘 견디었던 우리 겨레를 위하여 어떤 작은 위로라도 전해주고 싶었던 진심이 그녀의 가슴 속에는 갈무리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1946년 2월에는 무궁화악극단 전속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해에 박향림은 혼인을 했고, 곧바로 아기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점점 불러오는 배를 치마로 감싼 채 여전히 쉴 새 없이 공연무대에 올랐습니다. 바삐 떠돌아다니던 공연 일정 중 어느 지방에서 몸을 풀었지만 제대로 산후조리조차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산모로서 충분한 출산휴식이 필요했던 박향림에게 고달픈 지방공연 일정은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전혀 회복이 덜 된 몸으로 얼굴이 퉁퉁 부은 채 강원도 홍천에서 또다시 무대에 올랐던 박향림은 마침내 공연 중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황급히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담당의사로부터 뒤늦게 산욕열(産褥熱)이란 병명만 겨우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후 박향림은 병석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병이 역사적으로 치명적인 질병이었단 사실을 주변의 그 누구도 알 리가 없었습니다. 산욕열은 출산 직후의 산모가 불결한 환경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무서운 패혈증으로 열이 39도 이상으로 오르는 몹시 위험한 병이었지요.

가수 박향림Ⓒ이동순

세상을 하직하던 시기에 박향림의 나이는 겨우 스물다섯. 한창 꽃다운 청춘으로 돌연히 이승을 작별한 박향림을 잃고 가요계는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해방 직후의 혼란 중이었지만 중요한 가수의 죽음을 그냥 지나쳐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해 7월, 박향림 추도공연이 서울 동양극장에서 열렸습니다. 한 아리따운 여성 가수의 죽음을 추모하던 날, 다수의 가요 팬들이 몰려들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날 공연의 이름은 '사랑보다 더한 사랑'이었고, 가수 박향림을 가요계에 첫 데뷔를 시켰으며 너무도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했던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출신의 박영호 선생이 슬픈 추도사를 읽었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대중잡지에는 박향림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한 스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글 속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타는 사모곡(思母曲)으로 넘쳐 흘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전혀 느껴보지 못한 그 스님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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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dslee5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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