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성의 변두리 시선]

[청년칼럼]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세월에 둔감한 편이라 날짜를 자주 잊곤 하지만, 신년만은 예외다. 굳이 달력을 챙겨보지 않아도 신년은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그 도래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새해 인사가 대표적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주도권이 휴대전화와 모바일 SNS로 넘어온 요즘에는 짧은 영상이나 화려한 이미지까지 더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래도 기본적인 레퍼토리는 변하지 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이 뻔한 레퍼토리에 태클을 걸어볼까 한다.

먼저 무언가를 받는다는 표현이 너무 수동적 느낌이다. 무언가에 공을 한번 넣어보자. 공을 던지는 쪽은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다. 반면 받는 쪽은 아무래도 맥이 빠진다. 공을 던지기 전까지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해도 던지는 쪽에 보채는 게 전부다. 현실에서 주고받는 대표적 관계가 축구의 공격수와 골키퍼다. 공격수의 평균 연봉이 골키퍼보다 높은 게 우연일까.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절대적이겠지만, 각각의 포지션이 주는 인상점수도 무시할 순 없다.

더구나 그 무언가가 복(fortune)이라면 수동적이라는 인상은 배가 된다.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것도 실력이라지만, 그래도 행운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영역이다. 요행으로 일이 성취되길 바라는 사람을 두고 수주대토(守株待兎)란 고사가 생기지 않았던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행운은 고려의 대상일 수 없다. 누군가 가계부나 예산 추계서를 적는데, 미래 수입 항목에 복권 당첨 따위를 적어놓는다면 놀림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 복 받으라는 인사는 실속이 없다. 말하는 쪽의 선의는 알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이 없다. 모든 걸 새로 시작하는 새해라면 듣는 쪽에게도 남는 게 있어야 한다. 교훈이라고 하기엔 거창하니 일신의 환기 정도라고 할 말 한마디 말이다. 그래서 난 몇 년 전부터 새해에는 행복을 찾으라는 인사를 하고 있다.

Ⓒ픽사베이

행운이나 복이 외생적이라면, 행복은 내생적이다. 받는 것이 수동적이라면, 찾는 것은 주체적이다. 바깥에서 행운이나 복이 굴러들어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가 두 손에 쥐고 살면서도 잊고 있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부터 찾는 게 순서상 맞을 것이다. 시간은 가차 없이 직진하기에 우리는 미처 행복인 줄 모르고 지나치는 일상의 기쁨들이 많다. 언제 올지 모를 행운을 빌다 자칫 그 기쁨들을 계속 잊고 살까 두렵다. 내가 구태여 남들과 다른 인사를 자처하는 이유다.

물론 괜한 트집일 수 있다. 어차피 의미가 뻔한 인사말들이니 바꿔본들 도긴개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말은 생각과 행동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는 종종 짧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놀라운 영향력을 보곤 한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쓴 故 리영희 선생은 생전에 ‘극락왕생’을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현세를 극락왕생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지 죽음을 피안의 세계와 동일시하면 현실도피일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무서운 집념이다.

모든 지나가는 해가 그렇듯 2019년도 다사다난했다.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것들과 해선 안 되는데 해버린 것들로 무수한 아쉬움과 후회들이 교차한다. 하지만 이들도 이젠 과거의 일뿐이다. 오늘이 아무리 비참하고 괴로워도 내일의 태양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는 요즘 가족들과의 시간을 자주 갖는다. 가족은 내가 2019년에 잊고 살던 일상의 기쁨 중 하나다. 독자 여러분도 각자의 행복을 찾는 신년이 되길 바란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