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논객칼럼]

지난 연말, 모처럼의 가족모임을 가졌습니다. 가장(家長)이 여기저기 떠돌며 살다보니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서 밥 한 끼 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큰아이가 결혼해서 분가한 뒤로는 일정을 맞추다가 지치기 일쑤입니다. 이번엔 큰아이가 앞장섰습니다. 연말인데 그냥 지나갈 수 없다며 집에서 포트럭 디너(Potluck Dinner)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사정 때문에 간단하게 외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모두 가벼운 표정이었지만 가족 중 단 하나는 가벼울 수 없었습니다. 바로 대학 졸업을 앞둔 작은 아이었습니다. 취업이라는 벽 앞에 서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지요.

그렇다고 제가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시쳇말로 ‘빽’이 든든한 아버지라면 여기저기 구직 부탁이라도 해보겠지만, 저도 아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니, 사실은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해준 조언은 시종일관 “너 좋아하는 일을 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행복한 일이 아니면 평생 갈등에 시달릴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용접공이 된 어느 젊은 화가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2년 전에 인터뷰한 청년인데, 그때 행복해 보이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 청년의 어린 시절은 공포로 채색돼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어머니를 때렸고, 그는 그런 현실이 무서워서 자꾸 그림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오로지 그림이 탈출구였습니다. 하지만 가난은 그림 공부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학원마다 찾아다니며 “일을 할 테니 그림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조른 끝에, 한 좋은 원장을 만나 소망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장학금 덕에 아슬아슬하게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그림에 대한 열망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공부한 끝에 졸업 후 3년 만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픽사베이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삶이 비교적 잘 풀렸습니다. 학교에 다니며 미술학원 강사를 하고 과외도 병행했는데, 실력을 인정받아서 여기저기서 소개가 들어왔습니다. 졸업 후에도 화실을 내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돈도 좀 모을 수 있었습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이번에는 유학을 가고 싶다는 꿈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유학비용을 벌겠다는 생각에 압구정동에 꽤 큰 규모의 학원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막상 학원을 연 뒤에는 어려운 일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규모가 커진 만큼 강사를 쓰다 보니 비용은 느는데 수입은 늘지 않았습니다. 적자를 보기 시작해서, 보증금까지 다 까먹은 뒤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남은 건 부채뿐이었습니다. 스트레스는 갈수록 심해졌고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결국 모든 걸 정리한 뒤 고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거기라고 기다려주는 게 있을 리 없었습니다. 평생 그림만 그렸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습니다.

‘빈둥거리는’ 아들이 못 마땅했던지, 어느 날 용접 일을 하는 아버지가 그를 작업장으로 데려갔습니다. 손에 토치를 쥐어주며 용접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용접이라는 것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그 순간부터 용접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용접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자존심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화가, 그리고 한때 잘 나가던 미술학원 원장이 용접이라니. 그의 안에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의논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용접은 아무나 하는 줄 아냐?”라며 그의 관심을 일축했습니다. 걱정 섞인 핀잔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섭섭했습니다. 어쩌면 그 한 마디가 그를 용접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오기로라도 해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한 대기업의 기술훈련센터에서 TIG용접 과정을 선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TIG용접은 타 용접에 비해 고숙련을 필요로 합니다. 결과물도 예술작품처럼 아름답습니다.

높은 경쟁을 뚫고 합격한 그는 정말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습을 합니다. 두 번의 실패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습니다. 어느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20년 동안 잡았던 붓을 움직이는 것처럼 용접 불꽃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마치 불꽃이 붓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는 교육생 중에 맨 먼저 자격증을 취득했고 기술훈련센터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취업을 했습니다.

그는 용접이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일과 뒤에도 남아서 연습하는 것은 물론 휴가 중에도 출근해서 토치를 잡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용접과 미술을 접목시키겠다는 꿈, 용접 관련 책을 써서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꿈… 무엇보다 용접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달인’이 되겠다는 꿈 앞에 그는 행복했습니다. 얼굴은 금방 씻고 나온 해처럼 빛났고, 긴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고승처럼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일하느냐가 행복을 가름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본인의 목표가 분명하고, 또 한참 꿈을 키워야할 작은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로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제 이야기로 마음을 바꾸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소위 ‘좋은 직업’ ‘좋은 직장’만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는 말은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진지하게 들어줬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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