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청년칼럼=이광호]  글을 쓰기 두려운 밤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깜빡이는 커서와 백지를 바라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문득 떠오르는 글감들을 낚아채어 몇 자 적어본다. 꾸역꾸역 진도를 나가다 모두 지워버렸다.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글을 쓸 수 없었다. ‘O적O(OOO의 적은 OOO이다)’  ‘OO의 말은 OO의 말로 반박 가능하다’는 인터넷상의 글들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도 모른다. 그 글들의 주인공처럼 나 또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너무 쉽게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려 드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의 내용과 구조는 비슷하다. 유명인 혹은 정치인쯤 되는 사람의 과거 발언과 현재의 행동이 모순되는 상황들을 모아놓는다. SNS와 방송 화면 등을 캡쳐해 반대되는 장면을 이어 붙여놓는 식이다. 알면서도 눌러보게 된다. 뻔한 내용이지만 재밌다. 말과 행동의 간극이 피식,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시원한 웃음은 아니다. 한편으로 찜찜함과 분노가 남는다. 분명 웃었는데 불쾌한 기분이 든다. 왜일까. 김수영의 시 「구름의 파수병」에서 힌트를 찾았다.

Ⓒ픽사베이

김수영의 시 「구름의 파수병」은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로 시작한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 해보자는 이야기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와 타인, 더 나아가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업 없이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객관화다.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인지라 나의 잘못보다 남의 잘못이 더 잘 보인다. 특히나 그게 정치인과 같은 고위직의 사람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잘못을 드러내고 풍자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내 잘못은 어느새 작은 것, 혹은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축소되기 마련이다. 나에게 좀 더 유리한 잣대를 대고 싶고 합리화 하고 싶은 게 인간이다.

타인이나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건 공동체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나의 발언은 부메랑이 되어 내 머리를 때린다. 나의 가치관 혹은 신념이라고 선언했던 말과 나의 ‘생활’이 ‘반역’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만천하에 공개된다. SNS에 올린 글은 지워도 사라지지 않고, 방송에서 한 말은 ‘짤’이 되어 평생을 쫓아다닌다. 우리가 누군가. 재미와 비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 풍자의 민족 아니겠는가. 본인이 한 말이 본인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광경이라니. 네티즌들에게 이보다 좋은 먹잇감이 없다.

전에는 ‘다 그렇게 사는 거지’ 하며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로남불’이 유행어처럼 쓰인다는 건 지금 이 시대가 공정과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음을 일부 반영한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말 하나, 행동 하나 조심해야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은 인쇄되어 종이로 남거나 온라인상에 업로드 된다. 그 속성 자체가 발화권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을 손가락질하는 데 너무 집중해서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보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사회와 나를 쉽게 구분해버리고, ‘나는 너와 다르다’며 타인을 쉽게 타자화 해버리고 나면 글에 남는 건 비대해진 자아뿐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공론화하는 것은 당사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함이다. 이 사실을 망각해서는 곤란하다. 이중잣대 혹은 내로남불이라는 논리가 상황의 변화나 입장차이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잘못이나 사회적 문제의 공론화가 누군가를 매장시키는 행위에 그친다면, 그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논란이나 오해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잘못을 지적해서는 안 되는 걸까? 글을 쓴다는 건 완벽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일까? 그건 아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자신이 ‘시’와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윤동주 또한 「쉽게 씌어진 시」에서 자신의 시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윤동주와 김수영은 썼다. 김수영은 ‘시를 반역한 죄’로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고 말했다. 이 시대에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일부러 자신의 일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멀리서 자신의 생활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념과 실천의 괴리를 피하지 않고 대면한다. 그리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 주는’ ‘어느 나의 친구’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조금 더 섬세함을 갖춘다. 두렵지만 써야 한다. 다만 부끄럽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이 시를 배반하고 있을 수 있음을 잊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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