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논객칼럼=김인철]

한겨울 물속에 핀 ‘수중매(水中梅)’, 매화마름!

미나리아재빗과의 여러해살이 수초. 학명은 Ranunculus kazusensis Makino

2020년 1월 8일 경자년(庚子年) 새해 들어 처음으로 꽃을 보러 먼 길을 나섰습니다. 12월부터 2월까지를 겨울이라 하니, 그야말로 겨울의 한복판이었습니다.

한겨울에 꽃구경이라니,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를 떠올리셨나요? 아닙니다. 제주까지는 먼 길이되 하늘길이니, 진짜배기 길이라 할 수 없지요. 걷든 차를 몰든, 제힘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다 동으로 방향을 트니 바닷가에 닿습니다. 검푸른 겨울 바다와 동천(冬天)이라 칭하는 파란 하늘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 뒤 이번엔 물길을 찾아 나섭니다. 해안도로 변의 바둑판처럼 구획 정리된 농지 사이에 난 폭 1m 남짓의 긴 농수로(農水路)가 그날의 목적지였습니다.

깊은 곳은 무릎 정도, 낮은 곳은 발목이 찰 정도의 깊이로 흐르는 물이 얼지는 않았지만, 한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차갑습니다. 콸콸 흘러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간단없이 이어지는 물길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그런데 아뿔싸, 흐르는 물속에 하얀 꽃이 피어 있습니다. 매화꽃을 닮은 흰 꽃이 물에 잠겨 있습니다.

2020년 1월 8일 경북 경주의 한 바닷가 수로에서 만난 매화마름. 한겨울의 추위에도 풍성한 가는 잎과 줄기가 청초한 연둣빛을 잃지 않고, 듬성듬성 피는 꽃은 아예 물속에 잠겨 있다. Ⓒ김인철
Ⓒ김인철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 자락 덮여도 /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도종환의 ‘홍매화’)라고 했듯, 이상 난동이라고는 하나, 한겨울 얼음장처럼 찬 물길 속에서 매화를 똑 닮은 흰 꽃들이 송이송이 피어나는 현장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매화 중에서 한겨울인 납월(臘月), 즉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를 납월매라 하고 눈 속에 피는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 일컬으니, 겨울 물속에서 피는 흰 꽃은 ‘납월수중매(臘月水中梅)’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5장의 흰색 꽃잎이 동그랗게 펼쳐지는 꽃은 물매화를, 머리카락처럼 가는 잎은 붕어마름을 닮았다고 해서 매화마름이란 이름을 얻은 여러해살이 수초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한동안 한란과 나도풍란, 광릉요강꽃, 섬개야광나무, 암매 등과 함께 ‘6대 멸종위기 야생식물 1급’으로 지정돼 최고 수위의 보호를 받다가 2012년 2급으로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국가적으로 중요한 식물자원으로 보호받고 있는 매화마름. 예전엔 모내기 전 물이 고인 논이나 습지, 연못 등에서 흔히 보던 꽃이었으나 산업화 시기 개체 수가 크게 줄면서 한때 절멸 위기에까지 내몰렸던 것이지요. 논이 밭이나 과수원 등으로 개발되고,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해 농약과 제초제 사용이 늘고 저수지와 수리시설이 발달해 천수답(물을 계속 가둬둬야 하는 논)이 줄면서 덩달아 매화마름도 눈에 띄게 사라졌습니다.

신록의 계절 5월 경기 강화도의 모내기 직전 논에서 흰 눈이 흩날리듯 풍성하게 꽃 핀 매화마름. 건강한 논을 상징하듯 백로가 매화마름이 자생하는 논 위를 날며 먹이를 찾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급기야 2000년대 초 한 자연보호단체가 경기 강화도에 남아 있는 매화마름 보전을 위한 범시민운동을 펼쳤고, 기증과 매입을 통해 3,014㎡의 논을 사들여 ‘시민자연유산 1호’로 지정했습니다. 초지리의 이 매화마름 군락지는 2008년 논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람사르 협약에 의한 국제보호습지로 등록됐습니다. 현재 이곳을 포함해 김포 화성 태안 고창 영광 등 서해안 일대에서 25곳이 넘는 매화마름 군락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2000년 이후 제초제 사용이 줄면서 개체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니다.

모내기가 시작되는 5월부터 추수가 끝나는 10월까지 벼가 논의 주인이라면, 매화마름은 11월부터 이듬해 모내기 전까지 습지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한 논의 또 다른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벼 베기가 끝난 건강한 무논(물을 댄 논)에서 11월 발아합니다. 그리고 겨우내 얼음 아래서 성장해 이듬해 4~5월에 흰 꽃을 피워 씨앗을 뿌린 뒤 물의 온도가 2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여름이 되면 녹아 사라집니다. 원줄기는 50㎝ 정도까지 옆으로 뻗고, 흰 수염뿌리는 땅속으로 파고듭니다. 물속 잎은 가는 실처럼 방사상으로 퍼지고, 물 위로 올라오는 잎은 통통합니다. 4월 말쯤 꽃자루가 물 위로 올라와 매화처럼 5장의 꽃잎을 가진 흰색의 작은 꽃을 가득 피웁니다.

 흰색 꽃잎이 5장으로 싱그럽고 단아한 매화를 똑 닮은 매화마름. 물속에서 방사상으로 줄기를 뻗고 손톱만 한 흰 꽃을 가득 달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그런데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강화도를 비롯해 서해안 일대 일부 논이나 수렁 등에 흰 눈이 내린 듯 풍성하게 피는 매화마름이 동쪽 해안가 물길에서 한겨울에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한 문구처럼, 참으로 세상은 넓고 꽃은 다양하고, 그 생태는 신비롭습니다.

.매화마름이 자생하는 동쪽 바닷가 수로. 3월 봄이 되자 이곳의 매화마름에도 꽃송이가 다닥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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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등 서해안에서 자생하는 매화마름과 달리, 꽃턱과 수과(瘦果), 턱잎에 처음부터 털이 없는 민매화마름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 학계의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매화마름이든 민매화마름이든 개화 시기는 4~5월로 같기 때문에, 겨울에 꽃이 피는 까닭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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