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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에는 ‘○○’ 비석이 있다?[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태실 조성 때 세운 금표(禁標), 화소(火巢), 하마비(下馬碑)의 의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20.02.20 14:53

[논객칼럼=김희태]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문화재 가운데 태실(胎室)이 있다. 태실은 한자 그대로, 탯줄을 의미하는 태(胎)와 집을 의미하는 실(室)인데, 쉽게 태를 봉안한 장소를 뜻한다.

이러한 태실과 관련한 풍습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김유신 전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만노군(신라 때 진주(鎭州), 현 충북 진천) 태령산 정상에 김유신의 태실이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고려사> 기록을 통해서 왕들의 태실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고려 때 태장경(胎藏經)이 과거시험의 과목이었다는 점은 태실 관련 풍습이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이야기해준다. 특히 조선의 경우 왕실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태실을 관리하고 기록을 남겼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태실과 비교가 된다. 이들 나라에도 태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왕조 전체의 태실 문화와 조성과 관리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사적 제444호), 초기 아기씨 태실비의 경우 태실비와 함께 장태 석물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김희태
청주 산덕리 태실(충청북도 기념물 제86호), 성종 이후 아기씨 태실비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김희태

조선의 태실은 크게 아기씨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이 되는데, 왕과 세자의 자녀라면 관상감에서 올린 삼망단자(三望單子, 3배수 추천)를 검토한 뒤 장태할 장소를 낙점하게 된다. 이 경우 예외없이 아기씨 태실이 조성된다. 전기의 경우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사적 제444호)의 사례처럼 태실비와 장태 석물로 조성된 경우가 있었지만, 성종 이후로는 지하에 태함(내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 등)을 묻고, 봉분 형태로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아기씨 태실 가운데 훗날 왕이 되는 경우 별도로 태실에 대한 가봉 절차를 밟게 된다. 이때 태실가봉비와 함께 웅장한 규모의 장태 석물이 추가로 설치된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왕들의 태실 모습이 이러하다. 물론 예외적으로 세자나 왕비의 태실이 가봉된 사례도 있다. ▶예천 사도세자(장조) 태실 ▶영주 소헌왕후 심씨 태실 ▶예천 폐비 윤씨 태실(경상북도 기념물 제174호) 등이다.

예천 폐비 윤씨 태실(경상북도 기념물 제174호), 왕비의 태실 가봉 사례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김희태

이러한 태실은 신분에 따라 그 규모가 다르다. 가령 <태봉등록>을 보면 태실을 1~3등급지로 구분했다. 1등급의 경우 통상 왕의 태실로, 태실 주변 3백보를 금표 지역으로 설정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별도의 수직(守直)을 두었다. 보통 세자나 세손의 경우 아기씨 태실을 조성할 때 이미 태실 가봉을 염두에 두고, 태실을 조성하기 때문에 태실을 이장할 필요가 없지만, 성종이나 중종처럼 세자나 세손이 아닌 경우 애초에 조성된 태실을 길지로 옮겨 태실을 조성하게 된다. 이는 성종의 태실이 최초 성남시 분당구 율동 태봉에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뒤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의 태봉산으로 이전했으며, 중종의 태실 역시 왕위에 오른 뒤 가평으로 옮겨 태실을 조성한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왕들의 태실은 별도의 태실가봉(胎室加封)을 통해 태실비와 장태석물이 추가로 조성해 위엄을 드러낸 특징을 보인다.

가평 중종대왕 태봉, 왕위에 오른 뒤 가평으로 태실을 옮겼는데, 이로 인해 가평군으로 승격이 되었다@김희태

반면 왕비 소생의 대군인 경우 2등급으로 2백보의 금표 지역이 설정된다. 또한 후궁 소생의 왕자나 공주, 옹주의 경우는 3등급으로 1백보의 금표 지역이 설정되며, 별도의 수직(守直)은 두지 않았다.

한편 궁궐을 떠난 왕자나 공주, 옹주의 자손 및 사대부의 경우 탯줄을 땅에 묻는 방식으로 보관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3년 2월 1일자)을 보면 “잠저(潛邸)를 뒤져 정원 북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찾아내었다”고 언급, 왕위에 오르기 전 선조의 태실이 잠저에 묻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태실은 신분에 따라 그 규모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 태실과 함께 세워진 비석, 금표(禁標), 화소(火巢), 하마비(下馬碑)의 의미

이러한 태실들을 방문해보면 태실로 들어서는 입구에 비석이 세워진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크게 해당 비석들에는 금표(禁標), 화소(火巢), 하마비(下馬碑)가 새겨져 있다. 금표(禁標)의 경우 한자 그대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의미로, 이는 태실과 자연경관을 보호하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태실을 조성할 때 신분에 따라 ‘1등급=300보’  ‘2등급=200보’  ‘3등급=100보’의 규모로 금표가 세워졌다. 이렇게 금표가 세워지면 그 안에 있는 농경지나 민가 역시 철거를 피할 수 없었다.

보은 순조 태실의 금표(=복제품), 뒷면에 서(西)가 새겨져 있어, 태실의 사면에 금표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김희태
영월 철종 태실지 혹은 철종 왕세자 태실지로 알려진 태실의 금표@김희태

당연히 백성들에게는 삶과 직결이 되는 부분이기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내용이 <태봉등록>에 잘 남아 있다. 때문에 간혹 태실 주변 나무들이 화재로 인해 훼손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방화를 의심하기도 했으며, 태실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방관들이 파직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태실에 남겨진 금표에 담긴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많은 태실들 가운데, 금표가 남아 있는 사례는 많지 않다. 대부분 땅에 묻히거나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태실과 관련한 금표는 ▶영월 철종 태실지 혹은 철종 왕세자 태실지의 금표 ▶보은 순조 태실의 금표가 있다.

홍성 순종 태실지, 태실과 관련한 유일한 흔적인 화소 표석이 남아 있다.@김희태
보은 순조 태실의 화소 표석@김희태

반면 화소(火巢)의 경우 대체로 능이나 태실 등을 조성할 때 세워진다. 화소는 일종의 산불이 능이나 태실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화소의 내부는 산불이 번질 수 있는 나무와 풀 등의 불쏘시개를 제거하게 되는데, 일종의 완충지대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소는 능이나 태실의 경우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그 경계에 화소 표석을 세운다. 실제 <건릉지>를 보면 건릉의 화소 표석이 ▶세람교 ▶홍범산 들머리 ▶하남산 ▶배양치 등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화소 표석의 경우 실물이 남아 있는 사례는 많지가 않다. 현재까지 ▶홍성 순종 태실지 ▶보은 순조 태실에 화소 표석이 남아 있다.

포천 태봉 석조물(=효명세자, 추존 익종, 문조)의 하마비@김희태
충주 경종 태실의 하마비@김희태

한편 태실에 세워진 비석 중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하마비는 보통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의 유교적인 건축물 앞에 세워진 비석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분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다. 대개의 경우 유교와 관련한 장소나 건축물 등에 설치되지만, 간혹 능이나 태실의 수호사찰이나 왕의 위패나 어진을 봉안한 경우에도 세워진다. 이러한 하마비를 지날 때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는 경우 범마(犯馬)라고 해서 처벌까지 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나름의 상징성이 있는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마비가 태실에 세워졌는데, 크게 태실 자체에 세워진 사례가 있는 반면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에 세워진 사례 등으로 구분된다.

영천 인종 태실(=은해사)의 하마비@김희태
보은 순조 태실(=법주사)의 하마비@김희태

전자의 경우 ▶포천 태봉 석조물(효명세자, 추존 익종, 문조) ▶충주 경종 태실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 ▶영천 인종 태실(은해사) ▶보은 순조 태실(법주사) 등이 있다. 이처럼 태실과 함께 세워진 금표(禁標), 화소(火巢), 하마비(下馬碑)의 존재는 당시 태실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대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혹 태실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태실과 함께 비석들에 담긴 시대상을 함께 주목해보기를 권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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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bogir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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