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나의 달빛생각]

[청년칼럼=이루나]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여러모로 까칠한 설날이 지나갔다. 연휴도 4일밖에 되지 않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 많은 곳 나서기가 꺼려질 즈음이다. 허나 밥벌이를 하는 곳은 서울이고, 나고 자란 곳은 부산인지라, 명절 때면 이동이 일상이다. 다행히 대기 번호 4000번대로 겨우 KTX 열차표를 구할 수 있었다. 클릭 한 번이면 수만 명의 사람들을 손쉽게 일렬로 줄 세울 수 있는 세상이다. 기술 덕분에 기회는 공평해졌다지만, 결과는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연휴 첫날 서울역에 도착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다양한 피켓을 든 정치인들과 자신의 신념을 알리기에 여념 없는 종교인들이 넘쳐난다. 어수선한 기차역과 달리 기차 안은 차분하고 조용하다. 명절 기차 칸 특유의 떠들썩함과 설렘은 온데 간데없다. 떼를 쓰고 우는 애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출산율 저하로 아이들이 줄어든 영향도 일부 있겠지만, 우는 애들을 달래는 데 특효약이 따로 있다. 호환마마보다 뺏기는 것이 더 무섭다는 스마트 폰이다. 이제 아이들은 '구독'과 '좋아요'가 가득한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며 자기만의 여행을 떠난다. 격세지감이다.

Ⓒ픽사베이

부산 고향 집에 도착했다. 여전히 부모님은 손주부터 찾으신다. 명절 때마다 손주 키를 재는 것도 부모님의 소소한 재미인 모양이다. 거실 벽면에 키를 잰 스티커를 빼곡히 붙여 놓으시는데, 이번에도 쑥쑥 잘 자랐다고 대견해하신다. 올해부터는 진주 큰아버지 댁에 6남매의 가족이 모이지 않기로 했다. 자녀들도 장성했고, 손주들도 늘어났으니 이제 각자 집에서 조용히 명절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설 전날 분주히 차리던 음식 준비도, 새벽에 일어나 눈을 비비며 지내던 제사도 사라졌다. 아버지는 애써 쿨하게 괜찮다고 얘기하시지만 내심 씁쓸해하시는 눈치다.

짬을 내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 아버지와 함께 다녀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의사 표현은 간간이 하셨는데, 이제는 인기척도 모르고 주무시고 계셨다. 아버지는 외할머니를 억지로 깨워, 미리 챙겨간 홍시를 떠먹여 드렸다. 이제 씹는 음식은 거의 못 드셔서, 이렇게라도 드시지 않으면 기력이 쇠한다고 했다. 병원을 나오는 길에 아버지는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담담히 얘기하신다. 요양병원에 드리워진 우중충한 먹구름이 마냥 밉게만 보인다.

부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하지 말아야 할 얘기도 나온다. 집집마다 아픈 구석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 어머니께 그만 언성이 높아져 버렸다. 덕담을 나누고 온정을 나누자고 모인 명절에 불효를 하고 말았다. 아내의 중재로 겨우 언쟁이 정리되고 어머니께 죄송하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직도 아리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을 보기로 했다. 다들 결혼도 하고, 얘도 있어 얼굴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큰마음 먹고 아내, 자녀 동행으로 보기로 했다. 장소와 시간, 식사 메뉴를 조율하길 여러 차례, 결국 한 녀석은 내부 조율에 실패했는지 약속 시각 직전 잠수를 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괘씸한 마음이 크다. 결혼하고 나면 복잡한 이해관계와 우선순위를 잘 챙겨야 한다. 명절처럼 낯선 곳에서 어색한 만남이 이어진다면 더더욱 예민해진다. 녀석이 나름 현명한 판단을 했으리라 믿어 본다.

설 다음 날, 아침 기차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짐을 쌌다.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미리 사두신 생선을 아이스박스에 가득 싸 주신다. 손녀가 좋아하는 갈치, 삼치, 빨간고기('눈볼대'의 사투리)가 가득하다. 씨알도 크고 때깔도 좋은 녀석들이다. 그래도 부산이 서울보다 생선값이 헐타('싸다'의 사투리)며 한 마리라도 더 넣어주시려고 애를 쓰신다. 처음엔 매번 잔뜩 생선을 싸주시는 걸 말려도 봤지만, 이제는 감사히 생선 박스를 받아든다. 이렇게 챙겨주시는 것이 어머니의 기쁨이란 것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기에.

연휴 마지막 날, 포천에 있는 처가에도 들러 장모님이 푸짐하게 해주신 명절 음식을 잔뜩 챙겨 먹고 돌아오니, 어느새 출근이 코앞이다. 4일간의 여정을 조심스레 더듬어 본다. 오랜만에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건만 즐겁고 따스한 얘기보다 날이 서고 까칠한 얘기들이 많았던 것 같다. 출근길 뉴스에는 어김없이 명절 후 이혼율이 급증한다는 가십 기사들이 상위에 올라와 있다. 설 명절의 변해 가는 모습 속에서, 정작 지켜야 할 행복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같이 까칠한 설날은 훨훨 보내버리고, 우리 모두가 행복한 설날이 되기를.

 

이루나

달거나 짜지 않은 담백한 글을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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