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논객칼럼=김인철]

@김인철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Eranthis stellata.

대동강이 풀리고 개구리가 뛰쳐나온다는 우수(雨水)·경칩(驚蟄)은 물론이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20일)까지 지났으나 몸과 마음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2020년 3월 하순입니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 여파로 너나없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고단한 데다, 겨우내 따듯했던 날씨마저 뒤늦게 툭하면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탓이겠지요.

그러다 보니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는 옛말을 새삼 실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익히 알려졌듯 중국 전한 시대 황제의 후궁이었으나 화친 정책에 따라 흉노의 우두머리에게 시집가야 했던 왕소군(王昭君)의 불운을 먼 후대의 시인이 대신 탄식한 ‘소군원(昭君怨)’이란 시의 한 대목입니다. 즉 700년도 훌쩍 지난 당나라 때의 시인 동방규(東方虯)는 수도 장안을 떠나 낯선 북방으로 가야 했던 중국 4대 미인의 하나인 왕소군의 비통한 심경을 “오랑캐 땅에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이 아니구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라는 말로 위로했습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너도바람꽃. 얼음장을 뚫고 눈구덩이에 선 모습이 장하기 그지없다.@김인철

꽃도 풀도 없어 봄 같지 않다고 한 때가 현대의 역법으로 정확히 언제였는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이들이 봄이 시작되는 3월에 불사춘(不似春)의 고사를 들먹이곤 합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는 3월, 봄인 듯싶지만, 겨울이 채 물러나지 않고 까탈을 부리는 간절기.

동방규는 그때 오랑캐 땅에 꽃도 풀도 없다고 했지만, 동토의 북방이든 열사의 사막이든 눈에 쉽게 띄지 않을 뿐 그 어디에나 생명은 살아 숨 쉬고 풀은 돋아나고 꽃은 피어납니다. 우리 땅 삼천리 강토는 더욱 더 비옥해 복수초, 변산바람꽃, 현호색, 노루귀, 앉은부채, 개불알풀, 산자고, 할미꽃, 꽃다지, 냉이, 제비꽃, 중의무릇 등 금방 열 손가락을 넘는 수의 풀꽃들이 언 땅을 헤집고 기지개를 켭니다. 산수유, 매화, 생강나무, 개나리, 진달래 등 나무에도 가지마다 꽃눈이 트기 시작합니다.

3월 말에서 4월 초 때늦은 서설이 내려 사방에 눈 세상으로 바뀌면 너도바람꽃은 환상적인 ‘설중화(雪中花)’의 주인공이 된다.@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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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 많은 봄꽃 가운데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피는 최고의 꽃을 꼽으라면, 단연 너도바람꽃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월 초 얼음투성이 산 계곡에 봄바람이 불면 순식간에 얼음장 같은 땅을 헤집고 나와 순백의 꽃을 피우는 너도바람꽃.

여전히 겨울 외투로 온몸을 감싸고 산골짝에 들어선 사람들은 키 15cm 안팎의 가냘픈 몸매에 지름 2cm 정도의 흰색 꽃을 달고 선 너도바람꽃을 보며 자연의 신비를, 생명에 대한 외경을 체감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강렬한 봄 햇살을 받은 수십, 수백 송이의 너도바람꽃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활짝 핀 광경을 보며 찬란한 봄날의 환희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러다 4월 초 때늦은 춘설이 내려 온 천지가 눈에 뒤덮인 계곡에서 역시 눈을 뒤집어쓴 너도바람꽃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오뚝 선 멋진 ‘설중화(雪中花)’를 보며 온갖 곤경을 이겨낸 작은 거인을 본 듯한 감동을 하곤 합니다.

언 땅을 비집고 막 올라온 너도바람꽃. 한두 송이에 불과하지만, 생명의 외경을 느끼게 한다.@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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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그 어느 순간이든 자연의 주인공이 되는 너도바람꽃. 복수초와 변산바람꽃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피는 ‘봄의 전령’으로 꼽히는데, 너도바람꽃의 학명 앞머리인 에란티스(Eranthis)가 본래 라틴어 봄(er)과 꽃(anthos)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콩나물 줄기처럼 생긴 꽃대 끝에 흰색 꽃이 한 송이씩 달리는데, 키는 다 자라야 10~20cm에 불과합니다. 꽃 구조는 통상적인 꽃과는 다소 다릅니다. 즉 일견 꽃잎처럼 보이는 5~9장의 흰색 둥근 잎이 실제로는 꽃받침입니다. 꽃받침 바로 안에 원을 그리듯 빙 둘러 난 막대기 같은 것이 꽃잎입니다. 길쭉한 꽃잎은 10개 안팎으로 비교적 여럿인데 2개로 갈라진 끝에 주황색의 꿀샘이 있습니다. 꽃잎 안에 다시 다수의 우윳빛 수술과, 연한 자주색 꽃밥을 단 암술 2~3개가 촘촘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개 하나의 꽃대에 하나의 꽃이 달리는데, 두 개의 꽃이 동시에 달리 ‘쌍둥이’ 너도바람꽃도 심심치 않게 발견됩니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전국에 분포하는데, 주로 습기가 많은 산 계곡에서 자생합니다.

@김인철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만개한 너도바람꽃, 화사한 봄날의 환희를 노래하는 듯하다.@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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