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주의 혜윰 행]

[청년칼럼=최미주]

한 때 ‘당연하지!’ 게임이 유행한 적 있다. 상대가 ‘너 나 좋아하지?’와 같은 곤란한 질문을 던지면 이에 ‘당연하지’라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혹 당황스러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게임에서 지게 된다. 어떻게 할지 우물쭈물 고민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곤 했다.

우리말에는 선인들의 말 문화가 담긴 속담들이 많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등만 봐도 같은 말도 가급적 상대가 듣기 좋게 하는 편이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이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속담에 ‘당연하지’라 대답하지 못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한국에서 자라온 사람이라면 선생님이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남을 항상 배려해야 한다’, ‘웃어른을 공경하자’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덕분에 도덕 시험에서 이러한 문제가 보이면 당연한 듯 문제를 맞혀 왔다.

몇 달 전이었다. 연말, 새해 모임으로 이곳저곳 다니며 부어라 마셔라 한 달 가량을 정신없이 지냈다. 오랜만에, 혹은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순식간에 한두 달이 지나고 끊이지 않을 것만 같은 약속들이 하나씩 줄어들자, 혼자 지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이후 한동안 흥 오른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나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 힘들었다. 외롭고 따분해서가 아니었다. 그간 흥에 취해 내뱉은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기 때문이다.

‘A를 치켜세운다고 B를 너무 깔아뭉갰나? 언짢았으면 어쩌지?’, ‘첫 만남에 나를 너무 드러냈나? 부담스러웠을까?’ 등 왠지 모를 잘못이 생각날 때마다 ‘아, 아니야. 아닐 거야. 그 정도로 기분 나빠하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지...’하며 실수로부터 회피하고 싶어 스스로를 달랬지만 위로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생각이 날 때마다 못난 자신과 마주하게 되어 괴로웠다.

픽사베이

결국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잘못과 그에 대한 반성, 개선점을 하나씩 적어 나갔다. ‘남을 칭찬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언니만 생각해서 언니 남자친구 흉을 많이 본 것 같다.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을 흉보는 칭찬은 하지 말자’,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상대의 말을 더 주의깊게 듣기 위해 노력하자’

도덕 시험 점수와 실제 삶의 온도 차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당연하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은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을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 당연하다 여겨 온 것들을 당연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나 자신과 마주하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흘려 듣던 흔한 속담을 몸소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처음 깨달았다. 어른들이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해서 말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쉬운 듯하면서도 잘 잊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임무는 그러한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앞으로 마주하게 될 다양한 만남 속에서 이를 어떻게 잘 실천할지 고민하는 일이었다.

살다보면 ‘상대방’은 계속해서 변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동일한 사람마저 상황에 따라 기분이 여러 번 바뀐다. 이러한 변동 속에서 그때그때 상대방의 기분을 살펴 말하는 일은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다. ‘당연하다’는 것이 곧 ‘어렵다’는 말이었다.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께 효도하기,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기, 항상 겸손하기 등 우리는 여러 당연한 것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몸에 오롯이 지닌 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새로 산 보석이나 가전제품을 광내기 위해 아침저녁 닦는 것보다 매일 보는 가족에게 한결같이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에 선인들은 중요한 구절들을 속담으로 남겨서라도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평소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에 대해 당당하게 ‘당연하지!’라고 외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최미주

 일에 밀려난 너의 감정, 부끄러움에 가린 나의 감정, 평가 가 두려운 우리들의 감정.

 우리들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감정동산’을 꿈꾸며.

 100가지 감정, 100가지 생각을 100가지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쪼꼬미 국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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