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논객칼럼=안희진]

모 대학에 재직중인 A모 교수는 대학후배이자 신문사 후배다. 10년전 재직하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영국에 유학하여 ‘독일통일과 유럽사정’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국제관계학을 가르치는 유럽전문가다. 그가 어제 전화했다. 가라앉고 그렁그렁한 목소리에 바튼 기침을 계속하길래 이상해서 물었다. 3주전쯤 아내와 예배당 예배를 함께 봤는데, 아내는 지난주 코로나19 확진을 받고 포항의료원에, 자신은 자가격리 중 확진을 받고 안동병원으로 후송 입원 중이란다. 1만여명 확진자가 내 가까이에도 있음을 새삼 깨닫고 더욱 사태의 심각성과 보통의 일상인 교회예배가 감염 경로라는 사실에 더욱 경각심을 갖게 된다.

코로나19로 인한 작금의 <예배중단 vs 예배강행> 문제는 신학적/신앙적 논쟁도 아니고, 교회적이냐 반교회적이냐의 논란도 아니다. 그렇게 논쟁하고 논란을 삼고 싶은 사람은 있을 수 있겠지만 논란대상이 아니다. 죄송하오나 논란거리도 못된다. 만약 그것이 신학적/신앙적 논쟁이나 논란거리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중단과 강행'을 주장하는 분들끼리 진지하게 토론하면 되겠지만, 바이러스 확산속도나 환자, 사망자의 급증으로 그럴 여유가 있는 지 모르겠다.

어쨋거나 우리 보통시민, 보통교인들은 전염병 예방 및 확산방지 차원에서, 혹시라도 교회가 그 통로가 되면 안되겠다는 공공의식과 시민의식 차원에서 성숙한 판단을 내리면 될 줄로 안다. 논란거리도 아니지만, 그렇게 한가하게 논란할 만큼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통시민, 보통교인의 성숙한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회나 목사의 빠르고 냉철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전염병에 대한 일반적 판단의 문제로서, 구체적으로 예배당 예배 중단여부는 교회와 목사의 <판단>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나 목사가 그것을 판단하되 교인의 출석을 강요할 수는 없고, 개인 판단과 자유의사로 출석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라서 실제 교회나 목사의 목회력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픽사베이

예배중단 교회는 온라인 예배로 대표되는 대안이나 목회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구현함으로써 예배와 목회의 빈틈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예배중단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반대하는 교인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와 목회의 공백은 생각보다 크지 않고 많은 수의 교인들 지지 속에 조용히 코로나가 소멸되어 예배가 재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배강행 교회는 예배를 종전과 다름없이 드리고 있기 때문에 중단교회가 행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대처나 보완 프로그램 등을 계획할 필요가 기본적으로 없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와 목사가 예배를 계속한다고 해서 예배교인 숫자가 종전과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들이 출석이 반토막 났다고 한다. 때문에 이가 빠진 모습으로 우왕좌왕하다보니 목회 공백이 속속 드러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출석교인과 불출석교인 사이에 묘한 갈등양상이 나타나고, 심지어 출석파와 불출석파의 대립현상이 싹트기도 한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사태가 이미 심각상태로 석달째 접어들어 국가적인 판단을 정부가 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국가는 교회와 목사에 대해 예배와 모임을 중단해 달라는 성숙하고 사회적인 판단을 권고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고 상황이 이럴진대 이를 따르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고, 이를 강제한다고 해서 종교탄압이라거나 "공권력 남용" 등의 거친 반대는 설득력이 없다. 그런 식의 반대논리로 본다면, 일찌기 예배를 중단하고 정부의 권고를 따르는 교회나 목사는 반교회적이요, 종교탄압을 묵과하고 종교의 자유를 반납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논리가 서있는 주장인지, 토론이 가능한 상황인식과 근거가 있는 것인지, 토론이 되긴 하는 것인지 진정 모르겠다. 무엇보다 예배강행 속에서 어쩔 바를 모르고 교회와 목사 눈치보며 예배당으로 가는 순박하고 착한 교인들 보기가 너무 민망하고 안타깝다.

캘리포니아 연안에 나타난 죠스에게서 시민의 생명을 구한 사람은 대통령도 아니고 주지사도 아니었다. 연방의원도 주의원도, 시장도 아니었다. 상어를 연구하는 해양학자도 아니었고, 물고기 포획전문가도 아니었다. 죠스로부터 시민을 구한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마을과 시민을 아끼며 함께 울고 웃으며, 시민과 하나가 됐던 '일개' 보안관이었다.

대통령이 됐든 장관이 됐든 의사가 됐든 목사가 됐든 누가 됐든, 시민을 아끼고 동네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함께 할 수도 없고, 아무도 살릴 수도 없다는 걸 제발 깨닫길 바란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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