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성의 변두리 시선]

[청년칼럼=지은성]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적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당신 보시기에 좋아 빛과 어둠을 나누사 그렇게 밤과 낮이 생겼노라. (창세기 1장)”

어른이 된다는 것도 결국 하늘 아래 한 개체의 사회적·정신적 홀로서기일 뿐 아닌가. 그래서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성경의 이 몇 구절만은 믿으며 안도했다. 밤과 낮이 말 몇 마디에 생기고 사라지는 판에 그깟 어른이 뭐 그리 대수겠냐고. 나이만 차면 나도 어엿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모든 능력과 역할이 자연스럽게 생긴다고 믿었다.

하지만 신성모독이었던가. 이제 누가 봐도 영락없는 어른의 외형이지만, 여전히 그 능력과 역할이 내겐 요원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는 현재 운전면허 미보유자다. 그것도 도로 주행 시험에서만 4번 떨어진 지독한 운전치(運轉癡)다.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한 번은 갑자기 도로 공사를 하는 바람에 차들이 뒤죽박죽 엉킨 적도 있었고, 또 한 번은 옆 차가 무리하게 끼어들기를 한 적도 있었다. 모두 연습 때는 없던 악재였다.

픽사베이

삶은 실수할 때마다 패를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라는 소설가 최인훈의 말처럼, 내 미숙과 실수가 내가 쥔 행운마저 앗아가는 기분이었다. 운전대를 잡는 게 두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또 어떤 실수를 할지, 그리고 그 실수가 이번엔 어떤 불운을 가져올지 무섭다. 내 위치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하는 것도 고통이다. 도로 주행은 2인 1조로 짝을 이뤄 시험을 본다. 나와 짝을 이룬 4명은 모두 합격을 했다.

운전면허에 도전하면서 어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어른은 능력과 역할 같은 결과(outcome)라고만 생각했다. 원래 내 머릿속 어른은 조수석에 팔을 올리고 능숙하게 후진하고, 또 코너에서는 멋지게 코너링도 할 줄 알아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과정(process)이 중요한 것 같다. 피곤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끈기나 바쁜 와중에도 다른 운전자를 생각하는 배려심 같은 것 말이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도 어른의 덕목이다. 나는 곧 있을 5번째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틈나는 대로 머릿속으로 코스를 되새기며 눈을 감고 나만의 주행을 반복한다. 친구 한 놈은 960번의 도전 만에 운전면허 취득에 성공했다는 어느 할머니의 사연을 보내준다. 놈의 의도야 뻔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고작 4번 고배를 마시고 좌절한 난 그 할머니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사람인가. 이 모든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또 운전 능력을 어른의 개념 표제로 생각하는 게 선입견일 수도 있다. 운전은 기계 조작과 주행에 관한 상황 판단일 뿐이다. 운전 실력이 형편없지만, 어른다운 어른은 많다. 반대로 운전 실력만 뛰어난 정신·정서적 소아(小兒)들도 많다. 눈에 보이는 자격증과 한 인간의 성숙이 무관하다는 걸 이젠 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자신의 결함과 미숙에 당당해지자. 자신의 한계를 알고 또 이를 인정한다는 것, 그것도 어쩌면 어른의 진정한 성숙미일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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