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청년칼럼=김봉성]

어린 왕자를 만났다. 녀석은 내 최근 10년 사(史)를 듣더니 ‘아저씨는 바보구나’라며 비웃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다. 보아뱀이 삼킨 게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보아뱀은 나다. 내 속에 있는 건 뭔가? 이것은 연애 없는 연애 이야기다.

연애를 안/못 하는 사람은 바보 정도가 아니라 찌질하다. 감정싸움 없는 혼자가 편하다는 방어 논리가 얼마나 빈약한지는 스스로가 알고 있을 것이다. 연애 상대가 차은우나 수지라면 연애를 안/못 한 이유를 철회할 테니까. 그러므로 ‘혼자의 자유로움’은 차은우나 수지를 만날 수 없는 자기가치의 저렴함을 고백하는 것에 가깝다. 그들의, 아니 우리의 현실은 허장성세의 찐따다. 연애 공백 10년, 나의 찌질력(力)은 sky는 몰라도 인서울 중상위를 뚫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나는 ‘나-캐슬’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

연애의 기본 논리는 거래다. 나의 가치와 상대의 가치를 평가하고 서로를 맞교환한다. 소개팅 상대가 맘에 안 들 때, ‘나를 뭘로 보고!’라며 주선자에게 분노하는 지점에서 가치의 상호 교환은 증명된다. 연애는 대학 입학 전형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남자친구 전형’, ‘여자친구 전형’ 지원자이자 심사자인 셈이다. 지원자의 다양한 가치가 종합적으로 계산된다. ‘외형 전형’, ‘경제력 전형’은 없지만, 외형과 경제력 반영 비율은 압도적이다. 내신이나 수능 점수로만 대학을 뚫듯, 외형과 경제력만으로도 여러 전형에서 중복합격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아마 우리는 외형․경제력을 모두 갖춘 차은우나 수지의 대척점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형의 난감함은 학생부종합전형처럼 기준의 모호함에 있다. 외형과 경제력의 비중이 높은 것 같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종교, 신념, 성격, 성향, 취향, 취미, 화법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된다. 주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가중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당사자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사랑한 이유는 보통 사후적으로 밝혀진다. 영영 모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 시장이 자기 객관화의 시장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내 기준이 불확실하듯, 타인의 기준도 불확실하므로 타인의 평가는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불확실 안에는 ‘나의 외부’라는 다른 차원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고, 다양한 각도의 외부에 깎이다 보면 나의 대학 간판처럼 나의 객관적인 등급이 어렴풋이 감지된다. 나이가 들수록 기준의 정밀도는 올라가니 자기 객관화의 신뢰도는 점점 높아진다.

그렇다면, 비연애는 자기 객관화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물론 친구 사이나 취업 시장에서도 자기 객관화가 이뤄진다. 그러나 친구 사이는 기준이 지나치게 느슨하고 경쟁률이랄 것도 없고, 취업 시장은 기준이 지나치게 높고 경제적 가치만 반영해서 신뢰할 수 없다. 1:1에 수렴하는 성비에서 자신의 전부를 맞교환하는 적나라한 연애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어른들은 전쟁 중에도 애 낳고 살았다고 한다. 위급상황에는 성욕이 급등해 서로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매수세가 강하니 낮은 입찰가에도 계약이 체결되는 시장 논리와 같다. 그런데 현대는 매수세가 약하다. 성욕을 비롯한 대부분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대체제가 풍부하다. SNS와 넷플렉스로 외로움이 그럭저럭 위로된다. 언 발에 오줌 누기 형태겠지만 오줌은 무한히 쏟아지고, 갓 나온 오줌은 따뜻하다. 상대가 차은우나 수지가 아니라면 굳이 연애를 하지 않겠다는 선택도 충분히 이해된다.

픽사베이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는 10년 간 연애 시장에서 물러나 있었다. 다른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시작은 경제적 빈곤이었다. 88만원이라도 버는 것이 목표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돈이 생겼을 때는 시간이 없었고, 시간이 생겼을 때는 소설가가 되겠다며 방구석에 틀어 박혔다. 그러는 동안 혼자에 길들여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애를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경계가 흐려졌다. 애매할 때 ‘안 한다’를 선점하면 자존감이 보호되었다. 실제로 연애 욕구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2020년, 소설을 쓰려던 펜을 분지르고 보니 웬 초라한 사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제 밥벌이 하며 꿈을 좇는 환상 속에 머무는 동안, 현실의 나는 허, 참, 겨우, 그렇게 낡아버렸다.

연애가 하고 싶다. 이렇게 중얼거리고 보니 나는 순식간에 객관화되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감당해야 할 경제력은 따라 잡았다. 그뿐이었다. 생물학적 완성도는 10년 전에 비하면 상품성이 떨어졌다. 주름은 깊어졌고, 피부는 퍼석하고 처졌다. 안색은 탁해졌다. 체중은 7-8kg 늘었고, 체력 감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머리숱은 아, 마이페시아. 경제력 흑자로 외형 적자를 보전할 자신이 없었다. 한 때 백화점에 있었을 나는 아울렛과 땡처리 창고 사이에 처박힌 것 같다. 내가 악성 재고면서 악성 재고를 구매할 의사는 없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연애할 걸……은 이미 늦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영혼의 폐쇄성이 증대된 것이다. 일상에 내 취향만 반영하는 습관은 동질성을 비만하게 키워 이질성에 대한 면역력을 떨어뜨렸다. 연애란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것과의 조우인데, 나는 내가 허락하는 범주를 벗어난 상대의 속성을 인정하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화(化) 된 너’일 뿐인 것이다. 내게 온전히 맞춰주는 반려 개 같은 반려자는 없다. 나는 나로 살쪘다.

경험상 나돼지는 불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년 지지고 볶는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러나 간직할 만한 기억이 없었다. 혼자의 맛집과 여행지는 힐링이라는 이름의 무난함이었다. 무난한 시간은 무난해서 기억되지 않았다. 내가 본 예능, 드라마, 영화들이 내가 주연이어야 할 인생의 예능, 드라마, 영화의 시간을 대체했다. 내 인생의 주연은 유재석, 강호동, 강마에, 장그래, 쓰레기, 김사부, 김신, 존 스노우, 토니 스타크였다. 그런 주제에 나는 나돼지가 되어 시간을 나대지처럼 방치한 채 ‘자유로운 영혼’의 탈을 쓰고 쿨한 척 나댔다. 나는 타인 속의 나의 객관적 가치를 모른다. 주관으로 왜곡된 내 상(狀)에 갇혀 있었다. 인서울은 거뜬할 거라 생각하는 중학생 수준의 자아관이 이제야 조금 부끄럽다.

겨우 그런 나로 살고 싶지 않아 ‘너’가 필요하다. 너만이 내가 삼킨 것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보아뱀인지, 양인지, 여우인지도. 나는 나돼지 주제에 환상 속의 나로 쉽게 인생을 살아가려 했다. 그 인생은 밑 빠진 독에 시간 붓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찌질고 후배들은 나처럼 되지 않기를. 장기간 연애 결핍자들은 자신에게 미안해하기를.

그래서 나도 내게 미안, 좀 많이.

   김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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