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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곡 ‘노들강변’을 민요로 바꾼 가수 박부용[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06.10 09:15

[논객칼럼=이동순]

겨울이 지나가고 대지에 따스한 봄기운이 감도는 무렵,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련한 노랫소리가 있습니다.

'노들강변'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 곡을 듣는 주변 환경이 낙동강이나 한강 주변이면 더욱 좋을 듯하고, 그 강가에는 물오른 버드나무가 파릇한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계절이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지요. 그냥 부르는 노래도 무방하지만 만약 장고 반주가 곁들여진다면 한결 이상적인 분위기라 하겠습니다.

신민요-노들강면- 음반라벨 @이동순

노돌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여나 볼가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미드리로다

푸르른 저긔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돌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죽

만고풍상 비바람에 멧번이나 지여갓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미드리로다

푸르른 저긔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돌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녕으로

재자가인 앗가운 몸 멧멧치나 데려갓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녀서

이 세상 싸인 한이나 두둥 실구서 가거라   -<노들강변 전문>

 

신민요, 노들강변 가사지 @이동순

 이제는 경기민요의 대표곡이 된 신민요 '노들강변'의 가사 전문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른 가수를 환히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부용(朴芙蓉: 1901∼?)이란 이름의 기생출신 가수가 불렀는데, 봄날 오후의 나른한 시간에 라디오 전파를 타고 들려오던 '노들강변'의 애잔한 여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련한 슬픔을 머금은 듯 약간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가락으로 가수가 구성지게 엮어가던 이 노래에는 고단하고 힘겹게 살아온 우리 겨레의 강물과도 같은 역사의 내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곡조를 흥얼거리다 보면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무상한지 은연중에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고단한 역사 속에서도 자기 앞에 휘몰아쳐온 아슬아슬한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환한 얼굴로 강바람 맞으며 우뚝 서 있는 강가의 아름드리 버드나무 같은 우리 민족의 듬직한 표상을 느끼게 합니다.

가수 박부용 @이동순
 
 

민요와 신민요가 어떻게 다른가 하면 전래민요는 작자가 따로 없고, 지역마다 그 특수성을 담아내고 있지요. 하지만 신민요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일부러 만들었고, 그 때문에 지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잡가와 판소리, 민요 등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신민요는 직업적인 가수가 국악기와 양악기 반주에 맞춰 부르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930년대로 보면 가수, 작곡가를 겸했던 김용환(金龍煥)이 조자룡(趙子龍)이란 예명으로 신민요 작품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신민요를 부른 가수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대개 기생 출신들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생학교인 권번(券番)에서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친 그녀들이라 발성이 이미 신민요를 부르기에 너무도 적절한 목청을 지니고 있지요. 1933년 평양기생 출신으로 가수가 되었던 왕수복이 첫 테이프를 끊으면서 기생출신 가수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듯 떼를 지어 식민지 가요계에 나왔습니다.

옛 노래책에 수록된 노들강변 악보와 삽화 @이동순

낱낱이 호명해보자면 박채선, 이류색, 이은파, 선우일선, 박부용, 김복희, 김인숙, 한정옥, 미스코리아, 김운선, 왕초선, 김연월, 김춘홍, 이화자 등이 바로 그 꽃다운 이름들입니다. 기생들의 경우 직업적 이유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나 이력을 드러내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들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 활동하다가 어느 때에 생을 마감했는지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노들강변'을 불러서 만인의 연인이 되었던 가수 박부용!

그녀의 이력에 대해서도 그동안 뚜렷하게 밝혀진 자료가 없었습니다. 이 박부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저는 여러 곳을 더듬고 다녔는데, 마침 어느 일본인이 20세기 초반에 펴낸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1918)이란 책에서 한복을 단정히 입고 머리를 쪽진 박부용의 사진과 약력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감격에 찬 나머지 혼자서 커다란 비명을 지른 적이 있습니다.

조선미인보감에 실린 기생 박부용 @이동순

당시 서울에는 도합 4개의 권번이 있었는데 한성권번, 대정권번, 한화권번, 경화권번이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한성과 대정이 근 200명 가까운 기생을 거느린 대표적 규모의 권번이었지요. 박부용은 한성권번 소속으로 17세 때 찍은 얼굴 사진과 소개 글이 해당 책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소개하는 글은 박부용의 이력에 관한 최초의 서술입니다. 기생 박부용은 1901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이주해서 살았지만 부친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집안 살림은 기울었습니다. 그 때문에 박부용은 어린 시절,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는 소녀가장으로 모진 고초가 많았던 듯합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박부용은 1913년, 불과 12세의 나이로 서울 광교조합(廣橋組合)에 기생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독한 마음을 품고 열심히 학업에 정진해서 가곡과 가사, 경서잡가를 비롯하여 고전무용의 영역인 각종 정재무, 춘앵무, 검무, 무산향까지 모두 익혔습니다. ‘조선미인보감’에 묘사된 박부용의 자태는 마치 선녀같습니다.

‘단정한 용모에 성품은 온유하다. 어여쁜 귀밑머리는 한 덩이 새털구름이 봄 산을 휘돌아 감도는 듯한데, 발그레한 두 볼은 방금 물위에 피어난 한 송이 부용화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한창 레코드보급에 대한 열망으로 부풀어 오르던 1933년, 박부용은 오케레코드사로 발탁이 됩니다. 맨 처음 서도잡가인 '영변가'를 최소옥의 장고 반주로 홍소옥과 함께 병창으로 불렀고, 긴 잡가인 '유산가'를 박인영의 장고에 맞춰 불렀습니다.

 

노들강변의 작사가 신불출 @이동순

이후 민요 '사발가', '신개성난봉가', '범벅타령', '오돌독', '산염불', '흥타령', '창부타령', '신양산도', '신청춘가', '신애원곡', '한강수타령' 등을 취입했습니다.

잡가로서는 '신고산타령', '선유가', '수심가', '엮음수심가', '신닐니리야', '신창부타령', '신담바귀타령', '신오봉산', '신경복궁타령', '신방아타령', '제비가', '신산염불', '신천안삼거리', '풋고치', '신노랫가락' 등을 취입했습니다.

서도잡가로서는 '공명가', '자진난봉가', '난봉가', 가사로서는 '죽지사', '수양가' 등을 불렀습니다.

 

 

노들강변의 작곡가, 문호월 @이동순

박부용이 오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신민요가수로 활동했던 시기는 1933부터 1935까지 약 3년 동안입니다. 이 시기 모든 신민요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노들강변'은 1934년 1월에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음반은 오케레코드 창립1주년 기념 특별호로 발매되었습니다.노들은 ‘노돌(老乭)’에서 변화된 말로 서울의 노량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란 뜻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하네요. 이 한강은 조선시대부터 구역마다 서로 다른 별칭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뚝섬에서 옥수동 앞쪽을 동호, 동작동 앞쪽을 동작강, 노량진 앞쪽을 노들강, 용산 앞쪽을 용호 또는 용산강, 마포 앞쪽을 마포강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의 한강풍경 @이동순

 노들강변은 노량진 일대의 한강 지류 강변으로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운 뱃놀이가 번창했었지요. 당시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문예부장 김능인, 전속작곡가 문호월 등에게 전국의 민요를 발굴 수집하도록 했습니다. 문호월(文湖月, 1908∼1953)은 어느 날 만담가 신불출(申不出, 1907∼1969)과 함께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오던 길에 노량진 나루터에서 뱃사공의 구성진 노랫소리와 한강의 푸른 물결 위로 드리워진 봄버들을 바라보며 작곡의 착상을 얻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 당시 노량진 일대의 한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던 광경이 상상이 됩니다. 나라 잃은 시대, 얼마나 아름답고도 처연한 슬픔이 가슴 속에 서렸을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흥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강가의 선술집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언가를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문호월이 흥에 겨워 세마치장단으로 때로는 어깨춤을 추며, 또 때로는 주막집 탁자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악보를 엮어가노라면,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신불출이 즉시 노랫말로 다듬었다고 합니다.

@이동순

이렇게 해서 이 노래는 세상에 나오게 되었지요. '노들강변'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삽시에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식민지백성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과 제국주의 통치로 말미암은 가슴 속 울분을 이 노래를 부르며 달랬습니다. 작사자, 작곡자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신민요 '노들강변'은 이제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천안삼거리' 등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5대 민요곡의 하나로 영원불멸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이 노래로 말미암아 이후 신민요 장르가 엄청난 기세로 확장되어가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맨 처음 대중가요로 발표되었으나 발표된 직후부터 곧 경기민요의 한 갈래로 슬그머니 포섭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완전히 경기민요로 고정된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분단 이후 북한에서도 이 노래를 빠른 곡조로 편곡해서 즐겨 부르며 연주하고 있지요.

이 노래의 작곡가 문호월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타고난 음악의 천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음악수업도 받지 않은 채 독학으로 음악 실력을 키워서 작곡가로 활동을 했으니까요. 여러 공연장을 다니며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특히 무성영화에서의 반주악단 단원으로 참가해서 실력을 키워갔다고 합니다. 문호월이야말로 일본 엔카풍 곡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에 맞서는 한국인 고유의 민족적 스타일로 자신만의 개성을 확립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곡은 주로 민요적 풍모를 강하게 발산하고 있습니다. 가히 ‘신민요의 황제’란 칭호가 전혀 손색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봄맞이’(이난영), ‘불사조’(이난영), ‘오대강타령’(이난영), ‘앞강물 흘러흘러’(이은파), ‘관서천리’(이은파), ‘풍년송’(고복수, 황금심), ‘섬색시’(윤백단), ‘아리랑 술집’(김봉명), ‘천리타향’(남인수) 등의 작품에서 그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외사촌 아우인 손목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에게 소개하여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도록 뜻 깊은 연결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희망악극단, 빅타가극단, 현대가극단, 백조가극단, 나나악극단 등에서 유랑연예인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갔습니다. 6.25전쟁시기에는 고달픈 군예대 소속으로 활동을 했지요. 1982년 겨울, 그가 성장기를 보낸 경북 김천 남산공원에 문호월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경북 김천남산공원에 세워진 문호월 노래비 @이동순

작사가 신불출은 서울 출생으로 어린 시절 경기도 개성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이름이 신영일, 신흥식, 신상학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워낙 빈궁한 가정에서 자랐고, 이 때문에 막노동과 고학으로 야학을 다녔던 피눈물의 개인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25년 극단 취성좌(聚星座)에 입단하면서 드디어 타고난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의 재능은 주로 막간극이었습니다. 조선연극사를 거쳐 신무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극단을 옮겨 다니며 그의 명성은 점점 드높아갔습니다. 풍성한 해학과 날카로운 정치풍자는 식민지대중들의 심금을 크게 울리며 격동시켰습니다.이 때문에 일제 경찰의 수없는 구속과 투옥생활을 반복하며 고통을 겪었지요.

대표적 만담으로는 ‘동방이 밝아온다’, ‘곰보타령’ ‘엿 줘라 타령’, ‘망둥이 세 마리’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망둥이 세 마리’는 당시 세계의 흉포한 독재자 셋을 풍자한 것으로 일본의 도조 히데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을 다룬 만담으로 큰 인기를 모았지만 이에 따른 혹독한 정치적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1947년 북으로 올라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김일성으로부터 노력훈장을 받으며 공로배우로 뽑혔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조직적 문예정책과 통제사회의 실상을 풍자한 탓으로 보복을 받아 1960년대 초반 숙청을 당했고, 이후로는 전해지는 자료가 별반 없습니다.

1930년대 중반 식민지조선의 두 천재적 청년 문호월의 작곡에다 신불출의 작사를 얹으니 이로써 전설적 창작신민요 ‘노들강변’이란 작품을 민족문화사의 제단에 헌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두 위인은 가시고 우리 곁에 없지만 빛나는 노래는 남아서 영원히 우리의 허전한 마음을 쓰다듬어줄 것입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강제이주열차> 등 18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매몰시인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시인을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60권 발간. 신동엽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충북대학교,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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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dslee5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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