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서정의 글우물]

[청년칼럼=허서정]

회의가 끝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난데없이 손을 잡혔다. 손가락 귀여우시네요, 하얗고. 나는 놓여난 손을 재빨리 있던 자리로 되돌리며 맞장구쳤다. 하하, 네에.

한밤 중 인적 없는 물레방앗간이 아니다. 연하의 후임인 그는 나와 동성이라 라면 먹고 갈래? 와는 맥락도 달랐다. 한데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미묘해졌다. 정확히는 내 기분이. 회의 내내 옆자리에 앉아서 제 손가락을 관찰하셨나요, 라는 말은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당혹스러운 일은 순식간에 벌어진다. 화가 날수록 차분해지는 성격인데도 나는 침묵했다. 정색하면 안 된다는 무의식적 의무감이 ‘나, 방금 기분 나빴나?’ 스스로 던진 물음을 억눌렀다. 지난 일이 플래시백처럼 스쳤다. 무슨 손이 이렇게 빨라요? 머리 묶은 게 훨씬 낫네요. 얼굴이 엄청 작으시구나. 어머, oo씨 반팔 입었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담해 보이지? 나만 보면 막혔던 말문도 터지는, 연세 지긋하신 후임이었다. 참다못해 개인 카톡으로 불편을 호소했다. 보다 공적인 사유가 있었겠지만 얼마 후 그분은 퇴사했다. 괜히 마음이 찜찜했다. 같은 일이 두 번째임에도 즉각 대처하지 못한 이유는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픽사베이

뒤늦게 짜증이 확 치민다. 사무실 내 자리 주변으로 키보드 소리가 거칠어진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안 친한 사람이 저지른 무례를 어떻게든 납득해보려고 했다. 혹시 거친 감정을 앞세워 호의를 곡해할까 자기 검열도 잊지 않는다. 일방적인 이별 통보가 계속되면 (설령 상대 과실임이 명백할지라도)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실연에 초연해진 어른처럼 더한층 조심스러운 사람으로 ‘레벨업’ 한다. 마음을 걸어 잠그고 겉으론 물렁해진 척한다. 정글 같은 생존 게임에선 나를 내려놓아야 살아남는다.

마이어스(Myers)와 브릭스(Briggs)가 융(Jung)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고안한 자기 보고식 성격 유형 검사가 있다. MBTI다. 16개 유형 각각의 네 자리는 각각 외향-내향(E-I) 지표, 감각-직관(S-N) 지표, 사고-감정(T-F) 지표, 판단-인식(J-P) 지표로 구성된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유형은 변했을지언정 나의 첫 자리는 늘 I, 내향형이었다. 타고난 성격을 나쁘게 생각한 적은 없다. 세간 인식이 내 기준과 달랐을 뿐이다. 발표를 잘하고 사회성 좋은 외향형 아이, 사교적이고 사회생활에 최적화된 인재, 뭐 이런 평가 앞에서 내향은 곧 내성적 인간이 되어 그 부족함을 지탄받았다. 흔한 치료법으로 웃음 가면을 권한다. 부작용은 우울증이다.

성격을 비롯한 특질(trait)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고유한 경향이다. 그런데 사회가 부여하는 가산점이 개인들 사이에도 심리적 서열을 만든다. 가령 '인싸' 사원이 아웃사이더(속칭 '아싸‘) 팀원을 챙기는 상황이라고 하자. 겉도는 사람을 보듬는 입장에서 배려는 베풂이나 마찬가지다. 당신의 부족한 점을 내가 보완한다는 믿음이 때로 폭력적인 오만이 된다. 인싸는 ‘거리 두기’를 택한 아싸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존중하는 방법도 모른다. 상대방이 부탁한 적 없는 선물을 건네기 전에 먼저 ‘받아주시겠어요?’ 물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을 몰이해와 편견에서 찾아야 한다. 서점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자기계발과 대인관계다. 현대인들은 꼬인 인간관계에 넌덜머리를 내며 휴식과 방법론을 찾아 헤맨다. 왜? 앞에서 말 못 하니까. 손댈 수 있는 건 상대방 머릿속이 아니라 내 마음이니까 그렇다. 내 마음을 컨트롤하려고 남의 머리를 빌린다. 비극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잘 아는 기계는 새로 구입해도 사용설명서를 읽지 않는다. 어딘가 고장 나서 작동이 멈추고 내가 잘못 썼나 싶을 때, 그제야 설명서를 들여다본다. 사람 간 상호작용인 인간관계에선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타인에게 다가갈 때에도 안내서는 필요하다. 열쇠는 편견과 몰이해를 배제하고 서로를 면밀히 관찰하는 데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이렇게 말했다:

“타인의 어떤 말과 행동에 상처받는지를 잘 들여다보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내가 누군가와 주파수가 맞는지 탐색하는 과정을 생략하지는 못한다. 다만 불편한 예감이 들 때, 쉽지 않은 관계를 내 욕심만으로 시작하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는 것도 예의다. 마무리는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시 한 구절로 갈음한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허서정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기고자 펜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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