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논객칼럼=김희태]

영조 때부터 시작된 태실 조성의 변화, 그 중심에 있었던 창덕궁 후원

서울에 있는 궁궐 가운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 있다면 단연 창덕궁(昌德宮)을 들 수 있다. 다른 궁궐들과 달리 창덕궁은 궁궐 자체 보다 후원(後苑)으로 대표되는 정원 유적이 핵심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후원은 도심 속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다. 그랬기에 조선 시대에도 역대 왕들이 후원을 찾았고, 현재 후원 곳곳에 남아 있는 건축물 등을 통해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후원의 모습은 『동궐도』를 비롯해 『창덕궁 태봉도면』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창덕궁 태봉도면』을 자세히 보면 후원의 북쪽에 북악(北岳, 북악산)이, 동쪽에는 응봉(鷹峯)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응봉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드는 옥류천(玉流川)이 표기되어 있는 등 후원의 규모와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창덕궁 부용정 일원 @김희태

이러한 후원이 있는 창덕궁은 태종 때인 1404년 완공이 된 궁궐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을 피하지 못했고, 이후 인조 때인 1647년에 다시 복원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에 창덕궁에서 화재가 발생, 대조전을 비롯한 일대가 불에 타 소실되었다. 그러자 대조전 일원을 복원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경복궁의 교태전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을 해체해 창덕궁을 복원하는데 사용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조치냐 하면 경복궁은 명색이 조선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의 지위였던 까닭이다. 즉 경복궁은 조선 왕실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경복궁의 위상이 일제가 경복궁을 훼손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선총독부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경복궁의 건물을 해체, 창덕궁을 복원하는데 사용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전주 조경단 인근에서 확인된 창덕궁 금표@김희태
창덕궁 낙선재, 구 황족인 순정효왕후,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등이 거쳐했던 곳이다. @김희태

한편 나라는 망했지만, 창덕궁은 여전히 구 황족이 거주하는 공간이자 역사의 현장이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 이후 황실은 일제의 왕공족에 편입되었는데, 고종의 경우 덕수궁 이태왕(李太王), 순종의 경우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이러한 호칭을 통해 당시 창덕궁이 왕을 상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 바로 창덕궁 금표다. 창덕궁 금표는 조선 왕실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전주 건지산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건지산 일대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의 묘가 있는 조경단(肇慶壇)이 있다. 즉 창덕궁 금표는 건지산 일대의 땅이 창덕궁의 소유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사실상 조경단을 보호하기 위해 왕실에서 세운 것임을 의미한다.

한편 해방된 이후에도 순종의 황비인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 여사 등이 마지막까지 거처한 곳 역시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였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넘어 근, 현대를 거치는 동안 창덕궁은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다.

■ 규장각으로 잘 알려진 주합루(宙合樓), 이곳에 태실을 묻었다고?

그런데 이러한 창덕궁 후원에 태실(胎室)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시초문의 반응을 보인다. 실제 창덕궁을 방문했을 때 태실을 찾아 왔다는 필자의 말에 창경궁에 있는 성종대왕 태실 및 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지 반문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창덕궁 후원에 태실을 조성한 기록은 『정조실록』을 비롯, 『창덕궁 태봉도면』과 태실의 이봉 기록 등에서 확인된다.

현재까지 창덕궁 후원에 조성된 태실 가운데 태주가 확인된 것은 ▶숙선옹주 태실 ▶영친왕 태실 ▶덕혜옹주 태실 ▶고종 제8왕자 태실 ▶고종 제9왕자 태실 등이다. 이 가운데 영친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왕자, 고종 제9왕자 태실은 일제강점기 때 현 서삼릉으로 이봉되었다. 한편 옥류천 인근에서 태항아리가 출토된 바 있는데, 태지석이 확인되지 않아 누구의 태실인지 알기가 어렵다.

부용정에서 바라본 주합루 @김희태
 주합루(宙合樓), 규장각 건물로 잘 알려져 있다. @김희태

이러한 창덕궁의 태실 가운데 가장 먼저 소개할 것은 숙선옹주의 태실이다. 숙선옹주(淑善翁主)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순조의 누이가 되는 인물이다. 다행히 숙선옹주의 태실지는 기록과 현장이 일치하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정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갓난 옹주(翁主)의 태(胎)를 내원(內苑)에 묻었다. 우리나라의 옛 고사에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날 때마다 유사가 태를 묻을 곳 세 곳을 갖추어 올려 낙점을 받아서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곤하였다. 그런데 영종 갑술년에는 명하여 군주(郡主)의 태를 묻을 적에 안태사를 보내지 말고 다만 중관(中官)을 시켜 가 묻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을유년에 태를 담은 석함(石函)을 경복궁의 북쪽 성 안에서 얻고서야 비로소 중엽 이전의 옛 규례는 내원에 묻었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명하여 앞으로 태를 묻을 때는 반드시 내원의 정결한 땅에 묻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유사가 옹주의 태 묻을 의식 절차를 품하자, 상이 선왕조의 수교(受敎)를 준행하여 이 날 주합루(宙合樓)의 북쪽 돌계단 아래에 태를 묻게 하였다.”

- 『정조실록』 권37, 정조 17년(=1793년) 4월 8일 기사 중

위의 기사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 영조 이전까지 태실의 조성은 길지에 하는 것이 관례였고, 신분과 성별에 따라 태실의 규모 역시 다르게 조성되었다. 그랬기에 영조 이전의 태실은 전국적으로 고른 분포가 특징이었다. 그런데 영조는 을유년(=1765년)에 태실을 경복궁 북쪽 성 안에 묻는 것을 시작으로, 태실을 내원에 묻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태봉등록』을 보면 영조는 자신의 가봉 태실을 조성할 때 전례에 얽매이지 않고, 태실의 규격을 간소하게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는 태실의 조성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린 결과였다. 실제 태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이 결코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종실록』을 보면 장령 권필이 원자(=인종)의 태실을 조성할 안태지를 찾기 위해 경산으로 내려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안태지 주변, 집과 밭을 가진 백성들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왜 이런 표현이 나왔냐 하면 태실이 조성될 경우 집이나 밭 모두 철거를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여 선조 태실지, 태실 있던 자리에는 민묘가 들어섰고, 주변으로 사방석과 귀부의 파편 일부가 남아 있다. @김희태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 태실의 훼손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김희태

또한 태실의 조성과 수개 과정에서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고, 석재를 옮기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논과 밭이 손상되는 사례도 있었다. 때문에 조정에서도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지 않게 금전적인 보상 혹은 부역을 면해주는 방식으로 무마했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백성뿐만이 아닌 관리들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려실기술』은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를 인용, 민생을 도외시한 채 태실 공사에만 매달리는 행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 흉년에 민생이 도탄 중에 있는 때를 당하여 대신과 대간들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구제하는 데 급급하지 아니하고, 바르지 못한 말에 미혹해서 여러 번 성태(聖胎)를 옮겨서 3도의 민력(民力)을 다하고도 구휼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산릉의 자리를 가려서 정하는 것이 태를 묻는 것보다 중한데도 오히려 고장(古藏)을 피하지 않고 남의 분묘(墳墓)까지 파내는데, 태를 묻는 데는 오히려 옛 자리를 피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국내의 산은 다만 정한 수가 있고 역대는 무궁하니 한 번 쓴 곳은 다시 쓰지 못한다면 다른 나라에 구할 것인가. 그것을 계속할 도리가 없음이 명백하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2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장태(藏胎) 중

기록에 등장하는 성태(聖胎)는 선조의 태실로, 선조가 왕위에 오른 뒤 최초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에 있던 태를 찾아 춘천에 태실을 조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태실의 조성 과정에서 분묘가 확인되어 결국 공사는 중단되고, 결국 임천군(林川郡, 현 부여)으로 옮겨 태실을 조성했다. 이이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가뜩이나 나라의 흉년이 들어 민생은 도탄에 빠졌는데, 조성 중이던 태실에서 분묘가 나왔다는 이유로 공사를 취소하고 임천군으로 새로 옮겨 조성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즉 태실 공사에 공력이 집중되어 정작 백성들의 구휼에 나서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태실의 훼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도적이 명종의 태봉(胎封)을 허물었다. 이 태봉은 서산(瑞山)에 있는데 간악한 백성이 군수를 해치려고 하여 태실(胎室)의 돌난간을 깨뜨렸다.”

- 『선조수정실록』 권9, 선조 8년 11월 1일 기사 중

주합루 뒤쪽의 모습, 『정조실록』에는 주합루 북쪽 돌계단에 숙선옹주의 태를 묻었다고 했다. @김희태
 주합루 북쪽 돌계단, 기록에 언급된 숙선옹주 태실지로 추정된다. @김희태

따라서 을유년에 영조가 내원에 태실을 조성한 것은 무분별한 태실의 조성을 억제해 백성들의 고충을 경감시키고자 했던 영조의 의지가 반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조의 의지는 손자인 정조 역시 계승했는데, 이는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의 태를 주합루(宙合樓) 북쪽 돌계단에 묻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 정조 때부터 외부에 아기씨 태실의 조성하는 사례는 급격히 줄어드는데, 원자나 세자 등 왕위 계승과 관련이 있는 경우에만 조성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듯 현재까지 확인된 아기씨 태실 가운데 시기적으로 정조 이후, 그리고 왕의 태실을 제외한다면 ▶예천 문효세자 태실 ▶영월 철종 원자 융준 태실 외에는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영향으로 고종의 자녀인 영친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왕자, 고종 제9왕자의 태실 등이 창덕궁 후원에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창덕궁 태봉도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영친왕, 덕혜옹주, 고종 제8왕자의 태실지

한편 영친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왕자의 태실지를 찾기 위해서는 1929년에 제작된 『창덕궁 태봉도면』을 참고해야 한다. 도면에는 각각 정유태봉(丁酉胎封, 영친왕), 임자태봉(壬子胎封, 덕혜옹주), 갑인태봉(甲寅胎封, 고종 제8왕자) 등 3곳의 태실지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창덕궁 태봉도면』의 경우 장조 태실도, 순조 태실도, 헌종 태실도 등과 비교할 때 사실적인 기법이 후퇴하고,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해당 도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창덕궁 지적도와 함께 비교하면서 봐야 한다. 해당 태실지에 대해서는 2019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사한 바 있다.

 『창덕궁 태봉도면』 사진 제공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유태봉으로 표기된 영친왕의 태실지. @김희태
서삼릉으로 이봉된 영친왕의 태실, 태실비의 전면에는 이왕전하태실(李王殿下胎室)이, 뒷면에는 □□□년오월 / 자창덕궁비원이봉(□□□年五月 / 自昌德宮秘苑移封)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가장 먼저 『창덕궁 태봉도면』 속 정유태봉으로 표기된 영친왕의 태실지에는 태실을 이봉할 때 생긴 것으로 보이는 구덩이가 남아 있다. 태실지 주변으로 방공호가 만들어지면서 지형이 변했지만, 도면 속 좌우 골짜기의 윤곽을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임자태봉으로 표기된 덕혜옹주 태실지 역시 이봉할 때 파낸 인위적인 구덩이가 있으며, 도면 속에서 확인되는 좌우 골짜기가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갑인태봉으로 표기된 고종 제8왕자 태실지 역시 이봉할 때 생긴 구덩이를 확인할 수 있다. 종합해보면 각 태실지 모두 현재 태실의 이봉 과정에서 생긴 구덩이만 남아 있을 뿐, 태함 등의 석물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이와 함께 고종 제9왕자의 태실 역시 창덕궁 후원에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임자태봉으로 표기된 덕혜옹주 태실지. @김희태

서삼릉으로 이봉된 덕혜옹주의 태실, 태실비의 전면에 덕혜옹주태실(德惠翁主胎室)이, 뒷면에는 □□□년오월 / 자창덕궁비원이장(□□□年五月 / 自昌德宮秘苑移藏)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갑인태봉으로 표기된 고종 제8왕자 태실지. @김희태
서삼릉으로 이봉된 고종 제8왕자 태실, 태실비의 전면에는 고종제팔남태실(高宗第八男胎室)이, 뒷면에는 □□□년오월 / 자창덕궁비원이장(□□□年五月 / 自昌德宮秘苑移藏)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한편 『창덕궁 태봉도면』을 보면 태실지의 위에는 능허정(凌虛亭)이 있고, 아래에는 연경당(演慶堂)과 농수정(濃繡亭)이 표기되어 있다. 태실지를 찾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능허정은 숙종 때인 1691년에 만들어진 정자로, 후원의 산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연경당은 특이하게 궁궐이 아닌 사대부의 집 형태로,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조성했다. 진작례(進爵禮)는 신하가 왕에게 술을 올리는 의식으로,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효명세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농수정은 이러한 연경당의 부속 정자로,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처럼 날렵한 형상으로 표현된다.

창덕궁의 태실을 찾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능허정(凌虛亭). @김희태
 태봉도면에 표기된 연경당(演慶堂). @김희태 
옥류천(玉流川), 옥류천 인근에서 태항아리가 출토된 바 있는데, 기록과 정황을 고려했을 때 1765년 이후 조성된 태실의 가능성이 높다. @김희태

또한 응봉에서 발원한 물이 옥류천(玉流川)으로 흘러드는데, 태봉도면에도 옥류천이 표기되어 있다. 이곳에는 인조가 남긴 옥류천 각자와 함께 숙종이 남긴 오언절구 시가 새겨져 있다. 지난 1970년 옥류천 인근에서 태항아리가 출토된 바 있는데, 현재로서는 정확한 출토지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다. 또한 태지석이 확인되지 않았기에 누구의 태항아리인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창덕궁 후원에 태실을 조성하게 된 계기가 영조 때인 점을 감안해보면 옥류천 인근에서 확인 된 태항아리는 1765년 이후에 조성된 태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처럼 창덕궁 후원에서 만날 수 있는 태실의 흔적은 기존의 태실 조성 과정에서 생기는 폐단을 없애고, 태실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렇게 보면 창덕궁의 태실은 당시의 시대상과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따라서 향후 능허정 일대가 개방이 된다면 해당 태실지에 대한 이정표와 안내문 등을 설치해 관람객들의 방문과 태실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현장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해본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opiniontimes.co.kr)도 보장합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