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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자판기[이광호의 멍멍멍]
이광호 | 승인 2020.07.24 11:02

[청년칼럼=이광호]

‘아무거나’ 나오는 자판기가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아이들은 뭐 마실래? 라는 물음에 ‘아무거나’라고 대답했다. 목은 마른데 딱히 마시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을 때 자판기에게 선택을 맡기기도 했다. 무작위로 나오는 음료를 뽑아 먹는 재미는 제법 쏠쏠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동전을 넣어보았다. 운이 좋은 사람은 더 비싼 음료수를 얻게 되어 기뻐하기도 했다. ‘아무거나'는 뜨거운 관심에 힘입어 빠르게 매진되었다.

그것도 잠시. 언제부턴가 '아무거나'가 팔리지 않았다. 다른 음료가 다 팔려도 그대로였다. 자판기에서 정말 '아무거나' 나오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판매자는 평균 가격을 유지해 마진을 남겨야 하므로 넣은 돈보다 더 비싼 음료수가 나올 확률은 크지 않았다. 운이 좋아 더 비싼 음료수가 나오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기쁨은 가격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격이 높아도 원치 않은 음료수를 마시게 된 사람들은 기분이 상했다. 넣은 돈보다 싼, 혹은 원치 않은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에 흥미를 잃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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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세대가 이전에 비해 보수적으로 변해간다.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고 도전이나 저항과는 거리를 둔다는 말이 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거나 자판기는 효력을 잃었다.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도전한다면 더 큰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실패했다 하더라도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 정도는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아무거나 자판기엔 더 좋은 음료수가 없다. 간혹 나오기도 한다. 그 작은 확률을 뚫은 사람들의 방법론은 강연이나 책을 통해 설파된다. 그러나 그 방법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걸 경험을 통해 체득했다. 자판기 속에 기적이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선 끝없이 시도하고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다시 시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실패의 이유를 찾고 과절하고 다시 일어서며 성장한다. 그렇게 생성된 아이디어와 창작물들은 다른 산업, 다른 삶에 영감을 주어 사회 활력도 풍부하게 한다. 문제는 우리에겐 동전을 여러 번 넣어볼 여유가 없다는 거다. 딱 한 장 남은 천 원짜리다. 지폐 한 장을 다시 채울 확신도 없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한 곳에 투자하는 게 낫다. 눈을 낮추더라도 확실하게 보장된 상품을 선택하는 거다. 공무원을 택하고 공채에 매달린다.

그렇게 공정에 민감한 세대가 탄생했다. 이온음료를 보고 돈을 넣었는데 탄산음료가 나오기도 하니깐 말이다. 근데 이거 좀 이상하다. 천 원을 넣고 500원짜리가 나오면 어쩔 수 없다고, 현실이라고 체념하면서 더 좋은 걸 뽑으면 그 사람을 비난한다. 불공정하다면서 말이다. 그래봐야 우리는 자판기 관리자가 집어넣은 음료수를 뽑아 마시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해할 수 없지는 않다. 하나 남은 음료수가 나올 때까지 조마조마하며 차례를 기다리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성공은 나의 실패와 맞닿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도전은 불안이 되고, 좌절은 사회를 경직시킨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실패해도 동전 하나 집어넣으면 다시 태어나던 게임 속 주인공이 아니다. 실패가 낙오가 아닌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회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도 어렵다. 화면 앞에 두둑히 쌓아놓을 동전도 없다. 우린 생존을 위해 묵묵히 각자의 청춘을 동그랗게 말아 투입구에 집어넣는다. 그나마 보장된 상품을 뽑는 것, 정해진 상품을 유지시키는 것. 그게 지상 목표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자판기 밖을 생각할, 판을 뒤집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렇게 도전은 사치가 되었다.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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