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43]

[논객칼럼=김부복]

한나라 장군 한신(韓信)의 ‘배수지진(背水之陣)’은 유명하다.

한신은 조나라와 싸울 때 부하 장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면서 강을 등진 채 배수진을 치도록 했다. 자신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

그리고 한바탕 전투 끝에 패한 척하며 후퇴했다. 배수진을 치고 대항하는 사이에 미리 매복시켜 두었던 군사들이 적의 성을 점령, 한나라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

훗날 송나라 학자 심괄(沈括)은 ‘몽계필담’에서 배수진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신이 배수지진을 쓴 것은 상대 장수인 진여(陳餘)가 백전노장이라 실패할 진세로 유혹하지 않으면 따라 나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한신은 자기 재주가 진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병법을 택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피지기(知彼知己)’다. 후대 사람들은 적의 정세를 고려하지 않고 한신의 방법대로만 따라서 했으니 실패가 불 보듯 뻔했던 것이다.”

심괄은 ‘지피지기’라는 ‘손자병법’을 말하고 있었다. 누구나 아는 ‘지피지기’다.

“상대방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상대방을 모르고 자신만 알면,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진다. 상대방을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

손자병법 얘기처럼 상대방을 알기는 비교적 쉽다. ‘나 아니면 적’인 곳이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아는 게 오히려 쉽지 않다. 내가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노자(老子)는 “남을 아는 것이 지(智)라면 스스로를 아는 것은 명(明)”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를 초월하는 게 ‘명’이며, ‘명’은 깊고 깊은 통찰력이라고 했다.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말했다.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소크라테스 상 @픽사베이

뛰어난 사상가들이 이랬다. 머리에 든 게 ‘별로’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면에서, ‘나를 안다’고 주장한 손자병법은 좀 헷갈리는 병법이 아닐 수 없다.

수나라 양제가 어쩌면 ‘나’를 모르는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양제는 고구려 침략을 앞두고 큰소리를 쳤다. “고구려 것들은 우리 군(郡) 하나도 감당할 수 없다. 내가 그들을 정벌하겠노라.”

양제는 호언장담하면서 무려 113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출동시켰다. 고구려 따위는 군홧발로 밟아도 없애버릴 수 있는 기세였다.

양제는 호기 있게 고구려의 ‘오열홀(烏列忽)’을 포위했다. 오열홀은 고구려 왕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였다.

양제는 그 오열홀을 ‘요동성(遼東城)’이라고 고쳐서 불렀다. 벌써 고구려는 자기 영토가 된 듯싶었다.

그래서인지, 양제는 각 군에 ‘수항사자(受降使者)’를 배치했다. 글자 그대로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사자다. “혼나기 전에 빨리 항복하라”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황제의 권위’도 과시했다. “고구려가 항복해 오면 즉시 위무하여 받아들이고, 함부로 군사를 풀어서 약탈이나 살육을 자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지만, 양제는 ‘나’를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거느린 수나라 군사들의 능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국토가 광활했다. 수나라 군사들은 기나긴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군량도 부족해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수나라에게 고구려가 항복할 리가 없었다. 고구려는 수나라 군사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불세출의 영웅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을 하며 수나라 진영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군세를 둘러보기도 했다.

결과는 ‘살수대첩’이었다. 30만 5000명의 군사 가운데 살아남은 군사가 2700명에 불과했다. 99% 이상의 군사를 잃은 사실상 전멸이었다.

양제는 한 가지 실수도 하고 있었다. 장군들에게 ‘재량권’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가 ‘거짓 항복 사자’를 보내왔을 경우에도, 장군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양제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했다. 그러면서 지시를 기다려야 했다. 고구려는 그 사이에 수비 태세를 더욱 확실하게 갖출 수 있었다.

30년 후에는 당나라의 태종이 양제의 흉내를 냈다. 양제를 ‘반면교사’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수항막(受降幕)’이라는 것을 설치한 것이다.

‘수항막’ 역시 글자그대로다. 항복을 받아들이기 위한 장막, ‘텐트’다. ‘천자’의 위세에 놀라서 고구려가 알아서 항복하러 올 것이라면서 항복의식을 거행할 텐트부터 치도록 한 것이다.

그 사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의 군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고구려 첩자 ‘고죽리(高竹離)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당나라 척후병이 고죽리를 생포, 태종에게 끌고 왔다. 당 태종은 그 첩자에게 ‘황제의 아량’을 유감없이 베풀었다. 포승줄을 끌어주면서 “어째서 그렇게 몸이 말랐나” 물었다.

고죽리가 “숨어 다니느라 여러 날 먹지 못해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음식을 주면서 ‘황제답게’ 타일렀다.

“돌아가서 너의 막리지 연개소문에게 전해라. 우리 당나라 군사의 정보를 얻고 싶으면 사람을 곧바로 내 처소로 보낼 것이지, 이렇게 숨어 다니며 고생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가.”

당 태종은 맨발인 고죽리에게 신발까지 신겨서 돌려보냈다고 했다.

고구려의 첩자는 고죽리뿐일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첩자를 파견해서 당나라 군세를 분석했을 것이다.

당 태종은 자칭 ‘병법 전문가’였다. 손자병법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의 당나라 군사가 약하다는 사실은 잘 몰랐을 수도 있었다.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고 눈알까지 고구려에 남겨두고 후퇴한 게 그렇다.

군사뿐 아니다. 경제도 ‘나’를 모르면 야단날 수 있다. 이른바 ‘IMF 국치’ 때 경제를 하는 사람들은 “우리 경제 규모에 이 정도 외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큰소리였다. 그랬다가 나라 경제를 작살낸 ‘과거사’가 있었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K방역’을 과시하고 있다.

‘지피’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지기’다. 나 자신부터 깨우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교훈이 괜히 있는 것 아니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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