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송의 어둠의 경로]

[청년칼럼=서은송]

“사과 맛은 사과 속이 아니라 사과와의 접촉에 있다. 시 또한 오브제와 시인의 접촉에 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인 이경교 시인은 내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속에 이 주제에 대한 답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데 앞서, 글이 써지지 않는다면 대상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이는 곧 철학을 배제해서일 수도 있다.

눈의 시력이 좋지 않아서 글자들이 잘 보이지가 않는데, 안경을 쓰지도 않고 책을 보는 행위는 ‘척’에만 불과한 것. 글을 잘 쓰는 행위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담론화를 잘하는 것인데, 본디 담론화라는 것이 철학적 의미와 견해가 없다면 불가능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깃들어 있는 수많은 철학을 전부 알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대표적인 철학적 의의나 사회구조, 사상들과 같은 것들을 잘 모르면서 문학을 쓰거나 읽는 행위는 신문을 읽지도 않으면서 사회를 비판하는 어린아이처럼 무턱대고 징징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문학 속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철학을 통해서 일어나고 이것이 시인, 혹은 작가의 문자라는 ‘집’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통해 느낀 감정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구체적인 사물의 정황을 철학이라는 기반하에 관념으로 관통시키는 접촉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얘기이다.

픽사베이

프랑스 철학자이자 시인인 ‘생트 뵈브’는 ‘문학 작품은 단순한 상상의 유희나 이상한 변덕이 아니고 동시대 풍습의 모사이며 어떤 정신 상태의 전형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진규 시인의 대표적 시집인 ‘몸詩’와 ‘알詩’에서 문학의 이러한 특징들을 엿볼 수 있다.

몸이 놀랬다 / 내가 그를 하인으로 부린 탓이다 / 새경도 주지 않았다 / 몇십 년 만에 / 처음으로 / 제 끼에 밥 먹고 / 제때에 잠자고 / 제때에 일어났다 / 몸이 눈 떴다

-「몸詩·66」중에서

‘몸이 몸에 눈을 뜰 때에 지각하는 것도 신체이고 지각되는 것도 신체이다. 인간은 자기의 몸을 결코 3인칭으로 부를 수 없다. 인간의 신체는 1인칭의 신체이다 … 그러므로 몸이 눈 뜨는 순간은 주체가 주체임을 자각하는 순간인 것이다.’라고 김인환은 이 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한국문학의 묘미가 바로 이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한국문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의 내부로 곧바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시의 전경과 후경을 아우르면서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인의 사소한 습관까지 모두 글 속에서 파악할 수 있으니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닌가. 문학이란 작가의 일상과 배경에 의해 새롭게 탄생된 언어의 모음집이며, 이는 곧 그 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까지 이를 수 있다.

내가 경험해 온 한국문학은 이렇듯 작가의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저 갈망하는 상상을 추상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욕망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이 세상의 중심보다 허공의 가장자리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허공의 가장자리를 만져보았다고 말해왔다 거기서 뛰어내리기도 했다고 말해왔다… 사람들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얼마 전 땅 위에 어렵게 집 한 채 지었다 이상한 일이지 그 뒤론 사람들이 만나지지 않는다 -

「알詩·14 그리움」중에서

나는 이 시를 읽고 시인과 시, 그리고 시인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옅게나마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오래 닳은 슬픔 속에서 조심스럽게 채워 넣은 문자들을 보면서 저녁이 쉽게 오는 시인의 기다림을 느껴본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하여 시를 쓰면서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기다렸을지 가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부재해져가는 그 공간 속에서도 홀로 어떤 희망의 실마리와 의미를 찾아내려 애를 쓰던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세상과 사람 간의 관계의 균형감에 대해서 일컫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곧 그의 시로 직결되었고 그 시는 곧바로 나에게도 직결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 사람 간의 관계. 우리는 그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는 기로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울었는가. 보이지 않는 상처는 무엇으로도 덮거나 치유할 수도 없고, 설사 치유가 가능하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오래도록 아픔을 켜켜이 쌓아가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관계 속에 종속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발버둥을 친다. 나 또한……. 나는 정진규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의미 없게 놓아버린 연의 끈은 얼마나 되었는가. 왜 굳이 원망만 하려고 했을까. 의미를 넣었으면 되었을 것을. 정진규 시인처럼 말이다.

문학은 독자를 위한 글쓰기이다. 하나의 시라도 독자의 배경과 특성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파생되기도 하며, 그 속에 답이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이 4차 산업혁명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문학이 살아남는 이유이다.

문학은 전쟁통에서도 끓어올랐으며, 그 어떠한 위기에서도 살아남았다. 지구가 종말하는 직전까지도 문학도들은 글을 써내려갈 것이며 이는 곧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은송

 제1대 서울시 청소년 명예시장

 2016 서울시 청소년의회 의장, 인권위원회 위원,한양대  국어국문학 석사과정

 뭇별마냥 흩날리는 문자의 굶주림 속에서 말 한 방울 쉽 게 흘려내지 못해, 오늘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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