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칼럼=이동순]

한국가요사의 초창기에는 기생 출신들이 제법 많이 가요계로 진출했습니다. 그 까닭은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을 민간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딴따라, 풍각쟁이라며 천시하던 풍조로 가득했던 시절, 그 뉘라서 감히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나 꾸었을까요?

그런데 1930년대 중반 경기도 부평의 어느 술집, 술상 앞에서 노랫가락을 특히 잘 부르는 작부(酌婦)가 있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에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예나 제나 술꾼들은 재미난 술집을 찾아서 불원천리 더듬어 다니는 묘한 버릇이 있질 않습니까? 그 술꾼들로부터 입소문이 난 여성가객은 다름 아닌 이화자(李花子, 본명 李願載)였습니다. 훗날 민요계의 걸출한 여왕이 되어서 그 평판이 높았던 가수입니다.

호젓한 시간에 이화자의 노래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자르르 기름이 흘러내리는 듯 부드럽고 매끄러운 윤기에다 군데군데 팽팽한 탄력이 가히 일품입니다. 이화자가 불렀던 대부분의 노래 속에는 주로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기박한 신세를 넋두리조로 한탄한다거나, 서민들 가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삶의 피로와 체념, 애달픔을 눅진하게 묻어나게 하면서 사무치는 공감으로 젖어들게 하는 호소력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뛰어난 여성가수들이 많았건만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화자만의 독특한 음색과 창법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화자는 권번(券番)이나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등에서 정식으로 수련을 받은 기생도 아닙니다. 그저 팔자가 기구하여 이 거리 저 거리 술집으로 물풀처럼 떠돌던 중, 안목이 뛰어난 대중음악인 김용환(필명 김영파)에게 발탁이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화자가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용환의 전폭적 지원과 배려를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김용환과 이화자는 이렇게 맨 처음 술집에서 손님과 작부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당시 어린 작부는 대담하게도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앉은 채 모든 것이 귀찮고 싫다는 무료한 표정으로 활활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는군요.

태어난 곳이 경기도 부평 출생이라지만 이도 확실치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지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이화자는 평생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거기엔 어떤 말할 수 없는 서럽고 아픈 사연이 숨어있을 듯합니다. 아마도 1916년 무렵 어느 빈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술집에 맡겨져 더부살이를 해온 듯합니다. 아니면 술집 작부의 딸로 태어나 아비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술집에서 허드렛일이나 심부름하는 아이로 성장한 맹랑한 소녀였을 것입니다. 오로지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비틀비틀 살아온 것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녀가 겪은 기구한 삶의 애환이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가요 창법과 음색에서 어찌 묻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이화자가 뉴코리아레코드사를 통하여 가수로 첫 데뷔한 것은 1936년, 그녀의 나이 20세 때의 일입니다. 최초의 취입곡 '가거라 초립동'은 신민요 스타일의 작품으로 가요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어리광도 피웠소 울기도 하였소

홍갑사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아리살짝꿍 응 스리스리 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 간다 초립동이 간다 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가지 말라 잡았소 발광도 부렸소

고무신 한 켤레 사달라고 응석도 부렸소

아리살짝꿍 응 스리스리 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 간다 초립동이 간다 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노잣돈도 뺏았소 봇짐도 뺏았소

영 넘어 오백 리 가는 사람 신발도 뺏았소

아리살짝꿍 응 스리스리 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나를두고 못떠나요

못 가 못 가 초립동이 못 가 못 가 초립동이

날 두고 못 떠나요

-'가거라 초립동' 전문

 단 한 곡으로 가수로서의 이화자의 위상은 단연 우뚝해졌습니다. 이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전국의 레코드 상점 앞에 모여선 광경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빅터사에서 제작한 나팔형 축음기 앞에 모여 서서 이 노래를 따라 배우려 흥얼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후 이화자의 사진과 인쇄된 노래 가사지는 전국의 레코드 상점으로 속속 배달되었습니다. 뉴코리아레코드사 소속으로 있던 이화자는 단숨에 인기가 솟구치면서 자연스럽게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옮겨가게 됩니다.

당시 포리도루는 왕수복, 선우일선 등을 비롯하여 이른바 유명기생 출신으로 가수가 된 여성들이 수두룩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신민요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신민요곡들을 줄기차게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가수 이화자라는 존재와 그녀의 노래는 포리도루레코드사라는 보금자리를 모태로 날개를 달고 바람 부는 저 하늘 멀리 날아오른 한 마리 새와도 같았습니다. '네가 네가 내 사랑', '조선의 처녀', '실버들 너흘너흘', '아즈랑이 콧노래' 등을 불러서 히트를 했는데, 주로 조선 중엽 이후 서민들에 의해 즐겨 불리던 잡가 스타일의 민요를 많이 취입했습니다.

작사가 조명암과 작곡가 김용환은 이화자 노래의 효과를 제대로 살려내는 충실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말 그대로 이화자의 노래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버들 숲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조선의 콧노래였습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압제 속에서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전통의 가락이었고, 삶의 애환을 되살아나게 하였습니다.

이화자의 인기가 자꾸만 상한가를 치게 되자,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모두 오케레코드로 모여야 한다는 욕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당장 이화자를 만나 거액의 전속료를 제시하고 폴리돌레코드사에서 소속사를 바꾸도록 했습니다. 이런 화려한 과정을 거쳐 오케로 옮긴 이화자는 곧바로 신민요 '꼴망태 목동'(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손목인 편곡, 오케레코드 12190)과 '님 전 화풀이' 등의 특급 히트곡을 잇달아 냈습니다.

그녀가 발표한 대표곡의 면면을 두루 살펴보면 남권중심의 전통적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핍박과 수난사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자주 눈에 띱니다. ‘섬 시악시’ ‘시악시 열여덟’ ‘참말 딱해요’ ‘비련의 자취’ ‘울어나 다오’ ‘처녀의 마음’ ‘얼룩진 화장지’ ‘겁쟁이 촌 처녀’ ‘울고 간 무명씨’ ‘그 여자의 눈물’ ‘반 웃음 반 눈물’ ‘수심의 여인’ ‘신세한탄’ ‘화류애정’ ‘님 전 넋두리’ ‘마지막 글월’ ‘관서신부’ ‘눈물의 노리개’ ‘눈치로 살았소’ ‘님이란 임자’ ‘마지막 필적’ ‘결사대의 아내’ ‘반도의 차녀들’ ‘옥퉁소 우는 밤’ ‘’조선의 처녀‘ ’복수염낭‘ 등등입니다.

제목만으로도 가슴에 저릿하게 전해져오는 어떤 기막힌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지요?

1939년, 그러니까 이화자의 나이 스물 셋에 발표한 '어머님전 상백'(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오케 12212)이란 음반이 하나 발표되었습니다. 이 음반의 라벨에는 자서곡(自敍曲)이란 장르명칭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려서부터 떠돌이로 술집에서 자랐고, 뭇 남성들의 술시중을 들어야 하는 작부로 살아온 가수 이화자의 한 많은 삶과 비애를 마치 자서전처럼 고스란히 담아낸 기막힌 노래라 할 수 있었지요. 이 노래 가사를 모두 음미해보면 작사가 조명암의 뛰어난 시인적 역량을 짐작해볼 수가 있습니다. 절절한 한과 역사적 애달픔이 눅진하게 묻어나는 이 노래는 듣는 이의 간장을 토막토막 썰어내는 단장곡(斷腸曲)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나이까

복모구구 무임하성 지지로소이다

하서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어머님 어머님 이어린 딸자식은 어머님 전에

피눈물로 먹을 갈아 하소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로 어머님 이별하고

꽃피는 아침이나 새우는 저녁에

가슴 치며 탄식하나요

어머님 어머님 두 손을 마주잡고 비옵나이다

남은 세상 길이길이 누리시옵소서

언제나 어머님의 무릎을 부여안고

가슴에 맺힌 한을 하소연 하나요

돈수재배 하옵나이다

-'어머님전 상백' 전문

이 노래는 우선 한국의 옛날 전통적 서간체로 시작됩니다. 다른 말로 문안체(問安體)라고도 하지요. 혼례를 치른 신부가 신행 전에 시가(媤家) 어른들에게 안부 편지를 올릴 때 쓰는 문투입니다. 기체후(氣體候) 일향만강(一向萬康)의 뜻은 기력과 신체가 한결같이 전체적으로 아주 편안하신지요? 건강하게 편히 잘 계십니까? 이렇게 묻는 서간의 시작문구입니다. 그 다음 대목은 복모구구(伏慕區區) 무임하성지지(無任下誠至之)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엎드려 그리움이 저의 정성스런 마음을 어디 맡길 데가 없을 지경’이라는 극진한 마음의 전달입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가사에서 이 대목은 고향집의 그리운 어머님께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하소연하며 꿈에서나마 뵈옵고 위로를 얻으려는 작중화자의 심정이 간절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정신대로 죽음터에 끌려간 한국인 처녀들이 온통 망가진 심신으로 거의 초죽음에 이르렀을 때 흐느끼면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사 전편을 곡조와 더불어 찬찬히 음미해보노라면 틀림없이 새로운 경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노래 속의 작중화자는 지금 고향집으로부터 몇 만 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와 있습니다. 마을 이장의 꼬드김 속에서 스스로 지원해 이 머나먼 곳까지 떠나온 것이지요. 처음엔 단순히 취직이라고 말했습니다. 고향집을 떠나면 입도 덜고 또 매달 나오는 월급을 모아 고향집 부모님께 부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속아서 이곳까지 떠나온 것입니다. 남쪽으로는 필리핀, 보르네오,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자바 등 참으로 먼 곳입니다. 북쪽으로는 중국과 남만주, 북만주 등입니다. 어떤 이는 중국 남부지역 먼 곳으로 떠나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무얼 하느냐구요. 말 그대로 일본군대의 노리갯감입니다. 전쟁터에서 나날을 보내는 일본군 사병들의 성 노리개였던 것입니다. 혼자 반듯하게 누울 수도 없는 비좁은 밀실에서 마치 공중화장실처럼 줄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군 사병들의, 이른바 비천한 ‘정액받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조차 모멸적으로 위안부(慰安婦)였던 것이지요. 한 녀석이 누운 여성 위에서 잠시 헐떡이다 떠나가면 또 다른 녀석이 곧바로 들어와 같은 짓을 해댑니다. 이런 짓을 하루에 무려 백여 명씩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얼얼한 아랫도리는 감각을 잃은 채 너덜너덜 참혹한 만신창이가 되었구요.

고향집과 부모님은 잊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궁금증을 가지던 것도 오랜 예전의 기억입니다. 가장 힘들고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을 때 저절로 입안에 웅얼거리던 노래가 바로 이화자의 ‘어머님전 상백’이었습니다. 노래 속에서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님을 만나 뵐 수도 있었고, 당신의 무릎에 엎드려 실컷 울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잠시 동안의 꿈에서 깨고 나면 다시 악몽의 현실 속에 팽개쳐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노래는 모든 정신대 여성들의 핍진한 삶을 담아낸 노래로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노래 전체가 온통 눈물의 홍수에 잠겨서 흥건했습니다.

“여러분, 제발 이 노래만큼은 제 앞에서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당시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몹쓸 사역을 강요당했던 어느 할머니는 ‘어머님전 상백’에 얽힌 피눈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은 해에 이화자가 취입했던 대표곡으로는 '네가 네가 내 사랑', '실버들 너흘너흘', '노랫가락', '범벅타령', '삽살개 타령', '망둥이 타령', '금송아지 타령', '십오야 타령' 등입니다. 곡명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화자의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신민요 스타일의 창법으로 ‘타령’조를 즐겨 불렀습니다. 술집마다 거리마다 이화자의 노래는 줄곧 흘러나왔습니다. 보잘 것 없었던 가련한 술집 여인은 하루아침에 민족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가수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1940년 봄, 이화자는 자신의 생애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또 다른 절절한 노래 '화류춘몽'(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오케 20024)을 발표합니다. 이 노래는 모든 화류계 여성들의 기막힌 처지를 그대로 대변한 작품입니다. 평소 담배를 즐기던 버릇이 있던 이화자는 결코 손대지 말아야 할 아편에 슬금슬금 손을 대기 시작하다가 기어이 중독 증세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순회공연 중에도 아편이 떨어지면 온갖 소동을 부렸습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암흑기였던 1942년은 이화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암흑기였던 것이지요. 이 무렵에 취입한 군국주의 성향의 노래 '목단강 편지'가 그녀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목단강(牧丹江)은 북만주 지역의 길림성과 흑룡강성 등 두 지역을 도도하게 흘러가는 송화강의 여러 지류 중 가장 큰 강을 가리킵니다. 옛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만주로 망명해간 민족운동가들의 활동지역이기도 했지요. 노래 속의 작중 화자는 여성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어떤 사연으로 북만주로 떠나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습니다.

가사의 느낌으로 보아선 민족주의자는 아닌 것이 분명하고, 일제가 보낸 만주개척민 중 하나였거나 아니면 지원병으로 징집되어 만주로 파견된 일본군 병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식민지조선의 아내는 남편의 근황이 궁금해서 견딜 수도 없었지만 내내 참던 어느 날 남편이 보내준 편지를 받고 흐느껴 울면서 감격에 젖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하는 말이 만주는 난초꽃이 피는 복된 땅이니 부디 그곳에서 굳이 조선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거기 뼈를 묻으라고 합니다.

자기 또한 비상시국에서 여성에게 맡겨진 책무는 오로지 시국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다짐하며 과거 습관이었던 분접시와 화장도 전혀 하지 않겠노라는 맹세를 하고 있군요. 대체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그 따뜻하고 다정하던 부부사랑은 어디로 증발된 것일까요? 정상적 사고라면 남편이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부디 살아서 성한 몸으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권유일 텐데 이건 앞뒤 논리가 전혀 맞지 않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일제말 군국주의 정국에 너무도 노골적 아부와 영합의 색채를 보여주고 있군요. 작사가 조명암의 노래가사가 이 시기에 이르러 이미 군국주의적 동화의 색채를 너무도 심하게 나타낸 상처와 얼룩의 흔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1945년 드디어 해방이 되었지만 이미 마약중독자 이화자에게 8·15는 전혀 감격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비참한 생활고와 뼈저린 고독만이 그녀의 앞에 빈 개밥그릇처럼 휑뎅그렁하게 놓여있었을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무참하게 망가진 이화자는 서울의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 월세를 얻어서 오로지 아편으로만 세월을 잊으려 했습니다. 불과 30대 초반의 한창 곱던 여인은 마치 노파의 얼굴처럼 어둡고 우울해보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1950년 1월, 이화자는 대한청년단 창립1주년 기념공연 무대에 서게 됩니다. 그날 ‘춘풍’이란 제목의 음악극과 ‘칼멘환상곡’이란 음악시극이 공연되었지요. 주요 출연진으로는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단과 더불어 이복본, 손일평, 이종철, 최병호, 이난영, 이인권, 신카나리아, 장세정, 황정자, 이몽녀 등의 대중연예인과 함께 이화자도 모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가요팬들에게 이화자는 이미 잊힌 가수가 되고 말았지요. 노래 몇 곡을 불렀지만 예전과 같은 환호도 전혀 없었습니다.

6·25전쟁이 나던 해 겨울, 이화자는 차디찬 여관방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문을 닫은 서울의 어느 극장에서 동사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녀가 남긴 음반인 '이화자걸작집'은 지금도 다음과 같은 세리프를 잡음 속에서 애잔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고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이것이 화류춘몽의 슬픈 얘기다

기생이라고 으레 짓밟으라는 낙화는 아니었건만

천만층 세상에 변명이 어리석다

-'이화자걸작집'에서 배우 심영이 엮어가는 대사 부분

이 대사를 들으면서 반드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화자의 노래 '화류춘몽'입니다. 이 노래는 완전히 이화자의 생애 그 자체를 고스란히 다루고 있는 듯합니다. 권번을 터전으로 살아가던 수많은 기생들에게 이 노래는 거의 통곡의 비가(悲歌)로 다가갔습니다. 노래의 각 소절이 마무리되기 직전에 기생의 독백체로 중얼거리는 탄식에서 그녀들은 함께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찌 이렇게도 우리들의 신세와 처지를 잘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솜씨꾼 작사가 조명암의 붓끝에서 기생들의 가련한 삶과 존재성은 이토록 실감나게 재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으며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위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

점잖은 사람한테 귀염도 받았으며

나젊은 사람한테 사랑도 했더란다

밤늦은 인력거에 취하는 몸을 실어

손수건 적신 연이 몇 번인고

(이름조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빛나는 금강석을 탐내도 보았으며

겁나는 세력 앞에 아양도 떨었단다

호강도 시들하고 사랑도 시들해진

한 떨기 짓밟히운 낙화신세

(마음마저 썩는 것이) 기생의 도리냐

-'화류춘몽' 전문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강제이주열차> 등 18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매몰시인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시인을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60권 발간. 신동엽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충북대학교,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