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늘의 하프타임 단상 27]

[논객칼럼=최하늘]                  

어느 날 단체카톡방에 내 흥미를 끄는 것이 하나 올라왔다. 제목이 ‘내 묘비에 적힐 문구는?’이다. 생을 마감하는 날 내 묘비에 적힐 글을 알려주겠단다. 재미로 하는 놀이인 줄 알면서도, 슬그머니 호기심이 발동한다.

내 이름을 써넣으니 비석 사진 한 장이 뜬다. 비석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최회봉 이곳에 잠들다.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그것이 나를 조용히 미소 짓게 한다. 표현이 다소 거친 것 빼놓고는 더 바랄 게 없는 묘비명이다.

 

문득 오래된 일이 떠오른다. 정확히 45년 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독감 때문에 컴컴한 방에서 두꺼운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갑자기 엄청난 공포가 엄습해 왔다.

지금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감정은 아니었다. 웬일인지 무덤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 있었다. 나중에 죽으면 그런 곳에 영원히 누워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숨이 턱턱 막혔다. 이때 느꼈던 공포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과 고통을 주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 인류의 절반 정도는 ‘죽음’을 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육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함께 했던 모든 것을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영혼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사람을 무엇보다도 두려움에 빠트리는 것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듯 죽음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고,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터이다. 그런데 죽음이 끝이 아니고, 그가 마주하게 될 다른 무엇이 있다면?

만약 죽음 이후를 준비하며 산 게 아니라면, 죽음은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공포를 가져온다. 45년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60대 중반이 되니 친구들과 만남이나 크고 작은 모임이 더없이 반갑고 기다려진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웃고 떠드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행복이 묻어난다. 남은 20여년 여정도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내길 서로 기원한다.

하지만 집에 돌아올 때면 숙제를 미룬 아이의 심정이 될 때가 많다. 친구에게 하고 싶은, 아니 꼭 해야 할 말 한마디를 미처 못해서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일에 관한 얘기다. 바로 이것.

“친구여, 이제 자네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다음 생을 어디에서 보낼지를 선택하고 준비하는 것이라네.”

우리는 직접 보고 들은 게 아니라면 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보이는 세계는 물질세계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적 세계다.

만물 중 오직 인간만이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간다. 이를 믿고 안 믿고가 그 사람의 신앙이나 종교의 유무를 결정짓는다. 이는 사람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여부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영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 곧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육신(혼과 몸)은 사라지지만 영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영원히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창조 세계의 질서가 이를 믿건 믿지 않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데 있다. 신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영원히 산다. 단지 육신이 죽은 뒤 그들의 영이 가는 곳이 서로 다를 뿐이다. 신이 사는 곳과 신이 없는 곳. 사람들은 그것을 천국과 지옥이라고 부른다.

이 둘은 말할 수 없이 큰 차이를 갖는다. 신은 공평하기에, 선택권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져 있다. 둘 중에 좋은 것을 잡으면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그 선택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들이 사람 내·외부에 존재하는데 기인한다.

그렇다 해도, 지금 이를 두고 누군가와 진실 공방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유익을 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나 신앙, 정치 문제 등에서 그렇다. 이럴 때 사람들 사이의 시비나 다툼을 없애고 공감대를 형성해 줄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인생의 선배들이 남긴 삶의 지혜를 함께 들어보는 것이다.

특별히 오랜 세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이제 겸손히 인간 본연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 전하는 말이 그렇다. 또 삶의 여정을 끝내고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진솔한 고백에서 인생의 진리를 만난다. 그것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일 때,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여기 두 이야기가 있다. 먼저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5년간 진행한 ‘인류 유산 프로젝트’를 통해 들어보자.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인 칼 필레머 교수가 70세 이상 ‘인생의 현자’ 1000명을 만나 뽑아낸 삶의 조언이다. 그는 이를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이라는 책으로 냈다.

그가 만난 현자(賢者) 1000명 가운데 종교나 영적인 것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한 사람은 50명 정도였다. 신앙이 없는 사람조차도 대다수가 그 필요성을 인정한 셈이다. 이들이 ‘믿음을 가지라’고 강조한 것은 전도나 포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절대적인 신앙과 종교활동이 더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삶에서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현자들은 어째서 종교를 갖는 게 좋고 필요한지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하나는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 되고, 또 하나는 힘겨운 시기에 대처하는 유효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필레머 교수가 인터뷰한 사람 중에서는 규칙적으로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신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 또 종교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삶에 더 큰 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자들은 오래 살다 보면 피할 수 없이 겪게 되는 고통과 상실의 아픔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신앙을 추천했다. “신앙은 고통을 큰 흐름 속에서 바라보게 한다. 병이나 장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도 크게 낙담하지 않고 현실을 수용하게 해준다”

또 하나의 얘기가 있다.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가 남은 시간이 길어야 몇 주인 말기 환자 1000명과 나눈 대화다. 아무런 후회 없이 생을 마감하기란 불가능했나 보다. 그들 마음속 고통을 본 의사는 “무엇을 가장 후회하시나요?”라고 물었다.

이들의 마지막 후회에는 공통된 게 있었다. 오츠 슈이치는 그것을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로 간추려 책에 썼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많이 후회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신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이었다.

저자는 교토대 칼 베커 교수의 말을 빌려, “현대의 일본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원인은 내세를 믿는 신앙이 희박해졌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사람이 종교나 신앙에 의지했을 때 얼마나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지 잘 알기에,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고도 했다. 1000명의 죽음을 만나본 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비단 죽음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교활동을 통해 인간사를 깨닫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아무쪼록 잊지 않기 바란다.”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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