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후삼국의 잊힌 영웅, 견훤의 흔적을 찾아서

[논객칼럼=김희태]

예전에 후삼국 시대와 고려 통일의 과정을 다룬 사극 『태조 왕건』이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때 등장했던 여러 인물 중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견훤(甄萱)이다.

후백제를 건국하고, 왕이 되었던 견훤의 일생을 요약하면~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견훤 자신이 세운 나라의 문을 스스로 닫아야 했던 비극적인 운명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견훤의 일생 자체가 후삼국의 역사로 남았으며, 『태조 왕건』 이후 견훤에 대한 인지도 역시 높아진 편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후백제란 용어 자체는 당시 백제로 불렸던 것으로, 훗날 앞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현재 견훤과 관련한 유적지는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견훤이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백제라 했는데, 정작 견훤은 상주 가은현(현 문경시 가은읍) 출신이라는 점이다. 즉 백제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견훤이 정작 백제를 이야기한 것은 나름의 정치적 배경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더욱 견훤이 만들어간 역사의 궤적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경상도와 충청, 전라도 일대에 남아 있는 견훤 관련 유적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견훤이 만들어 간 역사의 장면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난 견훤, 문경과 상주에 남아 있는 견훤 관련 유적들

견훤의 탄생과 관련한 기록은 크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교차 검증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두 기록의 공통점은 견훤이 ▶상주 가은현 출신이라는 점 ▶성은 이씨 였는데, 견씨로 바꾸었다는 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다는 점이다. 반면 『삼국유사』를 통해 추가적인 내용의 확인이 가능한데, 아자개가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을 점거했다는 점과 견훤의 탄생 설화이다. 또한 사불성을 점거한 시기는 광계(光啓)의 연호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광계는 당 희종의 연호다. 즉 광계 연간을 환산해보면 885~888년 사이에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다.

 문경 금하굴, 견훤의 탄생지로 알려진 곳이다.@김희태

견훤 탄생 설화의 요지는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살던 한 여인에게 매일 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찾아온다는 말을 들은 여인의 아버지가 긴 실을 꿴 바늘을 남자의 옷에 꽃아두라고 말하게 되고, 이에 여인은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이후 실을 따라 찾아간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꽃혀 있었다고 하며, 이때 여인이 임신해 낳은 아들이 바로 견훤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화와 기록의 경우 견훤의 출신지가 다르게 표기되는데, 기록에서는 상주 가은현 출신이라고 한 반면 설화의 경우 광주 북촌으로 표기하고 있다. 다만 교차검증의 측면에서 보면 상주 가은현으로 보는 것이 맞다.실제 현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에는 견훤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금하굴(金霞窟)이 남아 있고, 인근에는 견훤의 사당인 숭위전(崇威殿)이 자리하고 있다.

상주 견훤사당, 상주 출신인 견훤과 민속신앙이 만난 형태다.@김희태
 상주 견훤산성@김희태

한편 견훤의 탄생지인 상주 일대에는 견훤과 관련한 장소들이 남아 있다. 바로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에 있는 견훤사당(민속문화재 제157호)과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있는 견훤산성(경상북도 기념물 제53호)이다. 특히 견훤사당의 경우 견훤과 민속신앙이 결합된 형태로, 이런 사례는 상주 이외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또한 지금도 견훤사당을 중심으로 동제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해 볼 지점이다.

반면 견훤산성이라 불리는 성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견훤이 성을 쌓았다거나 혹은 견훤이 산성에 은거하며 서라벌로 향하는 세금을 약탈했다는 전승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지지』를 보면 견훤산성을 화령고현성(化寧古縣城)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서쪽 50리에 있고 견훤성(甄萱城)으로 전해지나 잘못된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실제 성벽의 축성 방식이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기에, 견훤산성은 견훤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보다는 상주가 견훤의 출생지였기 때문에 전승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 신라의 비장에서 후백제의 왕이 된 견훤

이러한 견훤은 처음에는 신라의 비장(裨將)으로 활동했다. 나름 인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반란을 준비할 때 한 달 만에 5천명이 모인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견훤은 이를 기반으로 882년 무진주(武珍州, 현 광주광역시)를 습격, 결국 신라로부터 자립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런데 견훤은 처음부터 왕을 칭하지 않았다.당시 스스로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서명했다.

안성 칠장사, 명부전의 외벽에 그려진 궁예의 모습@김희태

즉 건국 초기에 아직 국가의 체계를 완비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왕이었지만, 표면적으로 신라의 관직을 사용하는 등 신라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900년에 견훤은 무진주에서 완산주(完山州, 현 전라북도 전주시)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백제라 정한 뒤 공식적으로 왕을 칭하게 된다.

이는 당시 후삼국의 정황을 보면 이해가 되는데, 우선 신라의 쇠퇴가 가속화된 점이 눈길을 끈다. 당시 신라는 경상도 일대만 간신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901년 궁예가 송악(松岳, 현 개성시)에서 후고구려를 건국, 견훤의 후백제와 함께 패권을 둘러싼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며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던 것이다.

 정읍 고부구읍성의 원경, 백제 때의 중방인 고사부리성이 있던 곳이다.@김희태

 

익산 왕궁리 유적, 백제의 왕궁 관련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김희태

그렇다면 견훤은 왜 국호를 백제라고 했을까?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견훤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이때 견훤은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망 과정을 상기시킨 뒤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라고 언급했다. 즉 견훤이 도읍을 삼았던 완산주는 옛 백제의 영토 안에 있던 지역으로, 완산주가 위치한 전라북도는 백제의 오방 중 중방인 고사부리성이 있는 정읍과 무왕 때 왕궁 관련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익산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여러모로 백제라는 국호는 정치적이자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반면 무진주가 있던 광주와 전라남도의 경우 발굴조사의 성과를 보면 백제 동성왕 무렵 직접 통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백제라는 동질성이 전라북도에 비해서는 약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에 견훤은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전주 동고산성 서문지, 한때 견훤의 왕궁지로 추정했으나 피난산성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김희태

 

 동고산성 출토, 전주성(全州城)이 새겨진 수막새@김희태

여기에 의자왕의 복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상주 가은현 출신인 견훤이 백제라 칭한 것 자체가 역사, 정치, 지역,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견훤의 왕궁지가 있던 완산주는 현 전라북도 전주시로, 그 동안 견훤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은 크게 ▶중노송동 인봉리 ▶전라감영터 ▶동고산성 등이 있었다. 그러나 동고산성의 경우는 왕궁지나 보다는 피난산성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맞다. 실제 후백제 이전의 도읍은 대개 평지성과 산성이 있는 형태였는데,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평지성)-환도산성(산성)’과 신라의 ‘반월성(평지성)-명활산성(산성)’의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우 실제 왕궁지는 중노송동 인봉리 혹은 전라감영터에서 찾을 수 있으며, 동고산성은 피난산성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한편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는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돌입하게 된다. 우선 눈여겨볼 점은 외교에 관한 부분으로, 견훤은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으며, 오월로부터 기존의 직위에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궁예는 후고구려를 건국하기 전이었고, 신라 역시 중국으로 가는 길이 막혀있는 상태였기에 이러한 외교는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다. 또한 925년 후당으로부터 기존의 직위인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을 더해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는 당시 후삼국의 선두 주자로, 정통성을 공인받는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견훤은 신라에 대한 영토 잠식 및 압박을 이어갔다. 여기에 후삼국 시대 최대의 경쟁자인 궁예, 왕건과는 군사적 대립을 피할 수가 없었다. 특히 왕건과의 군사적 대립은 초기 조물성 전투(924년)와 공산 전투(927년)를 거치며, 후백제의 우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 서라벌 침공과 공산 전투, 견훤의 최전성기 시절을 구가하다

이렇게 왕건과 대립하던 견훤은 주로 신라에 대한 압박을 진행하며, 대야성 함락에 공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로서는 대야성(大耶城, 현 경상남도 합천군)이 함락되면 사실상 서라벌(徐羅伐, 현 경상북도 경주시)까지 막을 수 있는 방어 시설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곳은 포기해도 대야성 만큼은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실제 『삼국사기』를 보면 대야성 관련 기사가 눈에 띄는데, 견훤은 901년부터 대야성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감행, 마침내 920년 대야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대야성 함락 이후 신라는 고려에 더욱 의지하게 되고, 실제 고려의 개입으로 어렵게 함락시켰던 대야성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이를 반전 삼아 견훤은 고울부(高鬱府, 현 경상북도 영천시) 습격, 서라벌 침공을 단행하게 된다.

경주 포석정지, 경애왕은 이곳에서 견훤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는데, 사실상 신라의 멸망이나 다름이 없었다.@김희태

 

경주 傳 경애왕릉@김희태

이에 경애왕은 다급히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시간 싸움에서 늦었다. 결국 견훤의 후백제군에 의해 서라벌은 함락당하고, 그 결과 신라의 경애왕은 자결의 형태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상 신라의 멸망과 다름이 없었던 순간이었다.이후 견훤에 의해 옹립된 왕이 경순왕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이 되는 인물이다.

한편 경애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던 중 도리어 매복하고 있던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되며,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해 죽음으로써, 고려로서는 천행, 후백제에는 아쉬움을 남긴 전투가 되었다. 이 전투가 바로 공산 전투로, 이 전투에서 여덟 명의 충신이 순절했다 해서 팔공산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팔공산 일대에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비롯해, 당시 전투와 관련한 지명인 파군재(破軍岾), 안심(安心)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대구 신숭겸 장군 유적지 중 표충단과 순절비@김희태

한편 조물성 전투에 이어 연이어 패배한 공산 전투의 충격은 사실상 견훤에게는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이 무렵 견훤은 왕건에게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겠다”며 패기 있는 국서를 보내기도 했다. 견훤의 자신감과 후백제의 상승세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으로, 견훤 일생의 최전성기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 고창 전투의 패전과 견훤의 몰락

하지만 930년에 벌어진 고창 전투의 패전으로, 후백제의 상승세는 꺽이게 된다. 고창(古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경상도에서 고려를 축출, 완전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일전이었는데, 바로 이 전투에서 패전한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당시 후백제 군은 병산(甁山) 밑에 주둔, 왕건과 일전을 벌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고창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8천명이 죽었다. 이후 견훤은 후퇴하면서도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고창 전투에서의 패전을 만회하지 못했다. 고창전투의 패전은 하늘 높이 치솟던 견훤의 자신감과 후백제의 상승세가 꺾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안동 태사묘, 고창 전투의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사당이다.@김희태

이 같은 결과는 견훤이 서라벌을 침공, 경애왕을 자진하게 했던 사건의 후유증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 고창의 호족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후백제가 아닌 고려를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즉 공산 전투는 외형적으로 왕건에게 괴멸적인 패배를 안겼지만, 명분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신라와 신라에 우호족인 호족들의 협력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고창 전투는 고려의 승리로 귀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고창 전투 이후 고창은 안동(安東)으로 바뀌게 되는데, 바로 동쪽을 평안하게 했다는 의미다. 또한 이를 보여주듯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는 안동 태사묘(경북기념물 제15호)가 자리하고 있으며, 고창 전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하는 차전놀이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안동 차전놀이, 고창 전투에서 유래한 것이라 전한다.@김희태

이후 후백제는 고려를 기습한 예성강 전투(932년)에서 승전했지만, 운주 전투(934년)에서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며, 점차 후삼국의 균형은 고려로 기울기 시작했다. 여기에 결정타를 가했던 사건이 바로 맏아들인 신검의 반란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견훤의 아들은 모두 10명으로, 그 가운데 견훤은 맏아들인 신검 대신 넷째인 금강을 사랑하여,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찬 능환의 주도로 신검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이에 동조했던 파진찬 신덕과 영순 등의 의견에 따라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현 전라북도 김제시)로 보냈으며, 후계자로 거론된 금강은 그 자리에서 참살되었다. 한편 후백제의 창업 군주였던 견훤이 아들에게 폐위되어 유폐된 사건은 후삼국의 균형을 흐트러뜨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 견훤의 후백제 탈출과 고려 귀부, 스스로 세운 나라의 문을 닫았던 견훤의 비극적인 죽음

견훤의 유폐 소식이 들려온 뒤 후삼국의 정세는 크게 요동치게 되는데, 가장 먼저 신라에서 감지가 되었다. 그 동안 사실상 고려의 보호국이나 다름이 없던 신라는 935년 경순왕의 주도로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하게 된다. 천년 신라가 그 막을 내린 일대의 사건으로, 사실상 후삼국의 대세가 고려에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경순왕의 귀부 이후 금산사로 유폐된 견훤 역시 후백제를 탈출해 고려로 귀부하며, 이제 후삼국 시대는 그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고려로 귀부한 견훤은 상보(尙父)라 불리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무렵 견훤은 자신이 세운 나라의 문을 스스로 닫기 위한 마지막 여정에 돌입하게 된다.

김제 금산사, 신검의 반란으로 견훤이 유폐된 사찰이다.@김희태

이미 창업주가 나라를 버리고 떠난 마당에 후백제 내부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실제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와 아내는 왕건에게 항복의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며,견훤 역시 왕건에게 참전할 수 있도록 요청, 마지막 소임을 다하기 위해 출전을 하게 된다.

마침내 936년 9월, 일리천(一利川, 현 경상북도 구미 추정)에서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일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바로 일리천 전투였다. 그런데 정작 전투는 싱겁게 끝이 났다. 후백제 군사들이 자신들의 왕이었던 견훤의 모습을 본 뒤 사기가 꺾여 투항하는 일이 빈번했고, 이런 혼란 속에서 후백제가 이길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리천 전투는 고려의 대승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후퇴하던 신검과 후백제 군사들은 황산(黃山, 黃山郡)으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황산은 옛 황산벌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논산이다. 『고려사』를 보면 황산까지 추격해온 고려군이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에 진을 치자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신검은 항복하게 된다. 그렇게 신검의 항복과 함께 후백제는 멸망하고, 고려의 통일로 귀결이 되었다.

논산 개태사지, 왕건이 후백제를 멸한 뒤 세운 사찰이다.@김희태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의 멸망 과정을 지켜본 견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산의 절에서 등창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일설에는 천호봉이 있는 황산불사에서 왕도인 완산주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했다고 한다. 이에 완산의 칠봉이 보이는 곳에 묘를 썼다고 전하는데, 바로 傳 견훤왕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은진현 편을 보면 견훤의 묘가 현의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있고, 속칭 왕묘(王墓)라고 불린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 속 傳 견훤왕릉은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외형은 특징이 없는 원형봉토분으로,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논산 개태사지는 왕건이 후백제를 멸한 뒤 세운 사찰이다.

 논산 傳 견훤왕릉@김희태

한때 서라벌을 침공해 경애왕을 자진하게 하고, 고려를 압도할 만큼 위세를 떨쳤던 견훤이었지만, 결국 최종 승리자는 견훤이 아닌 왕건이었다. 어쩌면 역사의 패배자로 남겨졌기에, 후삼국의 풍운아로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후삼국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견훤의 일생은 곧 후삼국의 역사 그 자체와 다름이 없었고, 오늘날 견훤 관련 유적지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서 고르게 분포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견훤 관련 유적지에 담긴 이야기와 의미는 앞으로도 잊히지 않고, 살아 숨쉬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과 함께 후삼국의 잊힌 영웅, 견훤의 흔적을 찾을 볼 수 있는 유적들을 한번 주목해 볼 것을 권해드린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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