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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땅은 우리 것, 태평양도 양보못한다”[김부복의 고구려POWER 44]
김부복 | 승인 2020.08.25 07:30

[논객칼럼=김부복]

어떤 일본 사람이 만주 벌판의 혹한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일본보다 위도가 높은 만주 벌판은 무척 추웠을 것이다.

“산천초목이 모두 얼어붙었다. 무엇이든 얼어버렸다. 날달걀은 삼각형이든, 사각형이든 마음대로 자를 수 있었다. 파는 마른 나무처럼 뚝뚝 부러졌다. 잉크도 양젖도 석유까지도 얼었다.… 밖으로 나오면 콧구멍이 얼었다. 눈을 감으면 위와 아래의 눈꺼풀이 달라붙었다. 길을 가는 사람은 수염이나 턱에 고드름을 늘어뜨렸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는 만주의 기온도 올려놓을 참이다. 몇 해 전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중국의 학자를 인용, 이렇게 보도했다.

“베이징스판(北京師范)의 왕쯔진 교수는 장기적으로 온난화는 중국에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약 기온이 계속 오른다면 쌀, 대나무가 황하 유역에서 다시 자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신강, 감숙, 내몽고 지역 등은 지금보다 더 살 만한 지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픽사베이

실제로, 지구온난화는 바닷물을 증발시켜 비를 많이 내리게 한다. 그 비가 황무지나 사막을 초록색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러면 농업과 목축업이 번성할 수 있다. 중국의 식량 생산은 ‘엄청’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주의 기온은 과거에도 높은 적이 있었다. 역사학자 윤내현 교수에 따르면, 고조선 때에는 만주의 기온이 지금보다 높아서 농사짓기 좋은 환경이었다.

“고조선 전기인 기원전 2000년까지는 기온이 높았다. 북만주도 농사짓기 좋은 기후였다.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적으로 기온이 상승했다. 8000년 전 기온이 지금과 비슷했다. 5000년 전에는 가장 높은 기온이었고, 3000년 전에는 지금과 비슷했다. 따라서 8000∼3000년 전에는 연평균 기온 지금보다 섭씨 3∼5도 높았다.”

윤 교수는 그 근거로 고조선 시대의 유물을 들었다. 돌로 만든 반달칼, 낫 등 추수용 농기구와 갈판, 갈대 등 곡물 가공용 농기구가 많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농토의 개간보다 추수가 더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게다가 만주는 황하 유역보다 토질이 좋기 때문에 농업이 발달했다고 밝혔다. 농업이 산업의 거의 전부였던 시절, 고조선의 국력이 간단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랬던 고조선의 농업 생산력이 고구려 때 갑자기 오그라들었을 리는 없다. 고구려의 농업도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고구려 때 만주의 기후는 지금보다 온화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우선 보여주고 있다. ‘삼실총’에서는 소의 모습을 한 ‘농사의 신’, ‘쌍용총’에서는 ‘우교차도(牛轎車圖)’ 벽화가 발견되었다. 농사의 신은 한 손에 벼 이삭을 들고 있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소머리 형상이라고 했다.

‘안악 3호’ 고분에서는 외양간 그림도 발견되었다. 그 외양간에서는 얼룩소와 누렁소, 검정소 등 색깔이 다른 소가 통나무 구유에 담긴 여물을 먹는 그림이다. 당시에도 소가 쟁기를 끌었을 것이다.

더욱 확실한 증거는 당나라 태종의 고구려 침략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기 645년 당나라 군사는 고구려의 개모성을 점령하고 ‘양곡 10만 섬’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또 요동성을 함락하고 ‘양곡 50만 섬’을 전리품으로 챙겼다고 했다.

그 ‘50만 섬’의 양곡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 따져보자.

“사람들은 대충 한 끼에 쌀 1홉을 먹는다. 하루를 먹으면 3홉이 된다. 1년이면 1080홉이다. 1섬은 1000홉이다. 1080홉이면 약 1섬이다. 쌀 1섬은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는 쌀의 양이다. 옛날에는 쌀 1섬 값이 금 1냥이었다. 1냥만 있으면, 한 사람이 1년을 버틸 수 있었다.… 논 1평에서는 한 사람이 하루 먹을 수 있는 쌀을 생산한다. 하루에 3홉 정도의 쌀이 1평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1년 먹을 1섬의 쌀을 생산하려면 논 300평, 1마지기가 필요하다.” <역설의 일본사, 이자와 모토히코, 고려원 발행>

당나라 군사가 점령 당시 요동성 인구는 ‘전사 1만 명, 포로 1만 명, 남녀 4만 명’이라고 했다. 모두 6만 명이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양곡 50만 섬’이 모두 쌀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쌀로 환산하면 양곡 50만 섬은 6만 명의 인구가 자그마치 8년 동안이나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다.

고구려는 그 정도의 ‘군량’을 비축하고 당나라와 맞서고 있었다. 고구려의 ‘국력’이었다. 당나라 태종은 그 넉넉한 양곡을 전리품으로 얻고도 ‘군량 부족과 추위’를 핑계로 안시성에서 후퇴하고 있었다.

만주에는 요동성과 안시성이 있다. 국내성, 백암성, 비사성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인지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일망무제’의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한바탕 통곡을 하고 싶다고 했다. ‘호곡장론(好哭場論)’이다.

“산모퉁이를 벗어나자 안광(眼光)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黑毬)가 오르락내리락한다. …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 번 울만 하구나’ 하였다.”

우리는 국력이 한참 오그라들었던 조선 말기에도 ‘만주 수복’을 논했었다. 1896년 8월 4일자 ‘독립신문’이다.

“원컨대 조선 사람들은 마음을 크게 먹어 십 년 후에 요동 만주를 차지하고 일본 대마도를 찾아 올 생각들을 하기를 바라노라. 하면 될 터이니 결심하여 할 생각들만 하고 못 되려니는 생각하지 말지어다.”

‘학창시절’이었던 ‘20세기’에 고려대생들은 ‘막걸리 찬가’를 외쳤다. ‘라이벌’인 연세대생들도 저항감 없이 함께 불렀던 ‘응원가’다.

“막걸리를 마셔도 사내답게 마시자. 만주 땅은 우리 것 태평양도 양보 못한다.”

이제는 그런 ‘호기’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통일 대박론’이다. 만주 수복에 대해서는 단재 신채호의 표현처럼, “찍도, 짹도 못하고 있다.”  ‘대국’인 중국의 눈치 때문일 것이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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