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Das Parfum)

              

[논객칼럼= 김호경]   

향기는 그 어떤 것도 차별하지 않는다  

신이 인간에게 (혹은 원숭이에서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했을 때) 만들어 준 감각은 5개이다.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이다. 이 중에서 왜 만들었는지 (혹은 왜 진화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후각, 즉 냄새를 맡는 감각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냄새라는 것은 향기로운 것, 아름다운 것, 황홀한 것이 아니라 고약한 것, 썩는 것, 더러운 것이 대부분이다. ‘냄새’라는 단어 자체부터가 아름답지 못하다. 지금 당장 후각이 없어진다면 약간은 불편하겠지만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나쁜 냄새들을 맡지 않아도 좋으니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른다.

               (<향수>; 향기에 집착하는 과대망상증(혹은 천상의 발명가) 사내의 이야기)

자연 상태에서 발생하는 냄새들, 인간이 만들어낸 냄새들은 수천 가지, 어쩌면 수만 가지일지도 모른다. 그 냄새들을 덮기 위해 또 다른 냄새를 만들어냈으니 바로 향수이다. 모든 것이 풍요롭지 못했던 7080 시절에는 [샤넬 No5]가 향수의 대명사였으나 지금은 수백 종의 값비싼 향수들이 범람하고 있다.

"향수는 바이러스다"

향수는 바이러스이다. 물의 형태로 갇혀 있다가 분사되면 향기를 내뿜는다. 죽은 바이러스가 활동을 개시하는 것이다. 향기, 즉 냄새 바이러스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권력자, 학자, 어린이, 노인, 종교인, 거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동시에 포위한다. 그리고 그들을 함락시킨다. 몸에 향수가 뿌려지면 그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는 힘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바이러스는 그만큼 강하다. 과문한 나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알고 있었다. 누군가 “바이러스는 스스로 태어나지 않고, 먹지 않으며, 배설물을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존재다”라고 알려준 후에야 생(生)이 아니라 사(死)라는 사실을 알았다.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사의 존재인 바이러스가 생의 존재를 파괴하는가? 이 질문의 명확한 답은 없다. 다만 살아있는 존재는 죽은 바이러스에게 공격당해 속절없이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동서와 남녀, 빈부와 학식, 종교와 이념, 선인과 악인을 따지지 않는다. 무차별이다.  

그를 없앨 수 없으므로 피해서 도망다녀야 한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는 1738년 7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때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였고 통치자는 루이 15세(Louis XV)였으며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이노셍 공동묘지를 밀어내고 만든 시장 거리에서 그르누이는 엉겁결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선장수였다. 당연히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 시장은 온갖 냄새를 풍기는 곳이었는데 냄새는 파리 전체, 나아가 프랑스 전체를 덮고 있었다. 쥐스킨트는 소설 곳곳에서 냄새의 성분과 종류에 대해 자세하고도 풍부한 묘사를 담았다.

예컨대, 땀에 절어 눅눅해진 이불 냄새, 요강에서 나는 오줌 냄새, 굴뚝에서 퍼져나온 유황 냄새, 양잿물 냄새, 도살장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 빨지 않은 옷에서 나는 악취, 충치로 인한 구취, 트림할 때 나는 썩은 양파즙 냄새.... 이 모든 냄새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르누이의 어머니는 아기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곧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르누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첫 번째 희생자였다. 아기는 고아원, 수도원을 전전하다가 유모 잔느 뷔시에 의해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현시세가 1주일에 3프랑임에도 “5프랑을 주겠다”는 테리에 신부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아기는 악마에 씌었어요.”

신부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우매한 민중들의 미신적 관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악마는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 하찮은 유모가 악마를 발견했다고 믿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악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모에게 정체를 들킬 정도로 악마는 멍청하지 않기 때문이다(이 말을 지금 상황으로 번역하면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정복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뜻이다). 신으로부터 받은 이성이 천년은 더 지나야 원시 신앙의 마지막 찌꺼기들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고 한탄한다. 몇몇 아이들은 그르누이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를 죽이려 든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윽고 아이들은 그를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대신 그를 피해 도망다녔으며 어떤 경우에도 그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쥐스킨트는 코로나19를 예견했던 것일까?

그르누이는 자라면서 세상 문물을 스스로 깨우쳐 간다. 이 깨우침은 불균형이다. 나무, 태양, 숟가락, 신발 등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권리, 양심, 기쁨, 겸손, 감사 등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대신 냄새로 모든 것을 파악해 간다. 냄새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그는 주인남자 냄새, 옆집 부엌에서 나는 냄새, 양배추 속의 벌레 냄새, 벽돌 틈에 감추어둔 돈 냄새를 맡고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그 예측은 한 번도 틀리지 않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향수>를 통해 바이러스의 공격을 일찌감치 경고했다.)

문제는 그 냄새들이 나쁘다는 점이다. 그르누이는 세상의 모든 냄새들을 이길 수 있는 향수를 만들기 시작한다. 가장 좋은 재료는 자연에서 채취한 꽃이다. 그러나 수천 종류의 꽃보다 더 좋은 재료가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아름다운, 처녀의 냄새이다. 그르누이는 그 자연재료를 얻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한 향수를 만들어낸다. 무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마치 2020년 지구촌을 덮은 ‘코로나 19’와 같다.

우리는 이제 역병(疫病), 전염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이른바 에볼라(Ebola), 사스(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메르스(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지카바이러스(Zika virus), 코로나19(Corona Virus Disease)이다. 이 질병들은 죽은 바이러스들이다. 이들이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무고한 희생자들의 생명을 가차없이 빼앗는다. 팬데믹(pandemic)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행히 하나의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내면 또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한다. 그르누이를 악마로 여겨 죽이려 한 아이들처럼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죽이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대신 그를 피해 도망다니고 있을 뿐이다.

        (영화 <향수>의 한 장면. 집단 광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34년 전 쥐스킨트는 <향수>를 통해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과대망상, 피해망상, 공포증으로 몰아넣고, 집단 우울증, 일상생활의 파괴. 죽음의 난무가 횡행하리라는 것을 묘사했다. 그는 바이러스 대신 향기(香氣)라 표현했다. 과연 그가 미래를 예측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곁에는 언제나 향기(좋든 나쁘든)가 존재한다는 점이며 그 향기가 악마로 돌변해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난감한 것은 그르누이가 그랬던 것처럼 바이러스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혹은 사람에 의해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이다.

  * 더 알아두기

1. 쥐스킨트(Patrick Süskind)는 1949년 독일 암바흐에서 출생했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1986년에 발표되었다. 37살에 세계적인 작품을 쓴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의 관점에서- 고전명작과 비교했을 때 작품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국적을 불문하고 현대 작가들의 창작력이 과거에 비해 하향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 <향수>는 톰 티크베어(Tom Tykwer)에 의해 2006년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작가가 영화화를 원하지 않아 설득하는데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국내 관객은 97만 명에 이르렀다는 통계가 있다.

3. 소설로 발표된 후 영화로 만들어진 현대의 독일 소설은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를 들 수 있다. 소설보다 영화가 더 널리 알려져 있는데 남녀 주인공 두 명의 자전거 타는 장면이 무척 아름답다.

4. 2차대전 이후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는 2명에 불과하다. 1999년 귄터 그라스(Gunter Wilhelm Grass)를 마지막으로 21년 동안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그라스의 장편 <양철북> 역시 영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반면 소설은 매우 길고 난해해서 읽기가 쉽지 않다.

                         (<양철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

5. 인터넷 교보문고 [독일작가 코너]에는 180명이 소개되어 있다. 그중 191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 중에서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타 볼프의 <나누어진 하늘>을 권한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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