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가 뭐 하는 사람이야?

[ 논댁닷컴=고라니]

결혼을 준비하다 보면 오백 개가 넘는 업체를 만나게 된다. 웨딩홀부터 시작해 허니문여행사, 드레스샵, 혼수업체,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사이버머니처럼 쓰는 기분은 제법 짜릿하다. 하지만 소비자로서 결혼시장에 참여하는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린 곧 불편한 진실에 직면한다.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결혼시장과 별개로또 다른 결혼시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곳에서 우린 상품으로 가판대에 진열된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사내 게시판에 결혼소식이 올라오면 당사자들은 꼭 이런 질문을 받는다. “배우자가 뭐 하는 사람이야?”, “부모님은 뭐하신대?”, “집은 샀어?” 개인의 근면함과 노력만으로는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는커녕 유지하는 것도 벅찬 요즘, 결혼의 낭만적인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다. ‘최소한 남들이 하는 수준’으로 결혼하기 위해서는 정말, 정말 많은 돈이 필요하다. 게다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시작부터 어느 정도 갖추어진 상태가 아니라면 결혼을 안 하는 게 가성비 좋은 선택이다. 그러니 누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경제적 배경부터 궁금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부모님이 서울에 흔쾌히 집을 해주거나, 부부 모두 전문직이어서 경제적 부족함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한 커플이 얼마나 될까. 비록 어려운 시기지만 배우자에 대한 애정과 확신으로 결혼을 결심한 커플이 훨씬 많을 거다. 그러나 첫 마음은 오래 가기 어렵다. 우리가 속한 집단이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좋고 나쁨의 기준, 그러니까 잘한 결혼과 못한 결혼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리의 살 속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자가소유 여부, 연봉, 집안, 학벌, 외모 등 한 인간의 상품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미 매뉴얼화된 지 오래다. 저 딱딱한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을 만났다면 청첩장 모임에 나가 왜 이 사람을 택했는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누구 남편은 의사라더라’, ‘누구는 교사 아내랑 결혼한다더라’ 같이 성역할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충족하는 케이스는 여전히 두루 회자된다. 서울 중심가에서 빚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한 친구를 보며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번쯤은 남들이 이야기하는 기준에 비추어 나의 결혼을 평가하게 되고, 그 순간부터 내 애인의 부족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더 큰 문제는 결혼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저 자신도 시장의 기준에 맞춰 재단하게 된다는 점이다. 내 시장가치가 남들보다 못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누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미래를 꿈꾸며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나보다 잘난 예비 신랑, 신부가 수두룩하다는 사실만 눈에 보인다. 결국, 내 자존심을 방어하기 위해 결혼 자체를 포기하거나, 굴욕감을 자양분 삼아 나의 시장가치를 높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시작한다. 이 차가운 시장 안에 사랑이나 진심이 자리할 공간은 없다.

가정을 꾸리는 데 있어 경제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을 시장에 위임하는 순간 삶은 불행해진다. 나보다 나은 상품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에 관심이 없는 타인의 목소리를 필터링 없이 받아들이면 회의와 자조로 가득한 신혼생활을 시작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갖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우리만의 기준을 찾으려는 싸움을 이어나가야 한다. 대화하고 조율하고 합의하는 일은 지독히 현실적인 전투다. 그 과정에서 쌓인 신뢰로 우린 이 험난한 세상을 같이 견딜 수 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잠시 눈이 어두워 안 보였을지라도, 그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는 여전히 우리 사이에 있다. 공일오비의 노래 가사처럼 ‘처음에 만난 그 느낌’을 간직한다면 이 차가운 세상에 서로에게만큼은  온기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전기나 가스가 필요 없는 온기라니. 제법 가성비 좋은 재산 아닌가.

                                                    고라니
    칼이나 총 말고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