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타임스=칼럼니스트 서은송]

아무 날도 아닌, 그냥 햇살 밝은 날. 아무 곳도 응시하지 않은 눈동자에 언뜻 화려한 건물에 요양병원이 비친 날이었다. 새삼, 무슨 요양병원을 저리 화려하게도 지었나 생각해보니, 미아역 부근에 자리 잡은 결혼식장이 보이지 않았다. 같은 자리, 같은 외형의 건물. 조금은 많이 다른 간판. 성처럼 생긴 건물의 화려한 금테를 두른 대리석 벽면에는 지나가는 차들이 비칠 정도로 눈이 부시다.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요양병원’이라 적혀있는 파란 간판.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결혼식장이 어떻게 요양병원이 될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지금의 사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적은 부부, 적은 아이들, 많은 어르신.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그저 선택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 내가 앞으로 마주쳐야 하는 것들이었을 뿐,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문득 쓸쓸함을 느낀다. 수많은 시작을 알리던 공간에서, 수많은 끝을 마주하게 되는 공간으로…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어제보다 오늘 더 죽어가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다가와 버린 고령화 사회 속에서 결혼식장이 요양병원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친다.

‘결혼식장’이라는 간판이 그저 ‘요양병원’이라는 네 글자로 변하고… 그렇게 도시가 변한다. 문득,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에서 읽었던 부분이 떠올랐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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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미술 전시회는 적어도 전통적 접근방식으로 볼 때 미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대상들을, 즉 인간 배설물과 죽은 동물까지도, 전시한다. 그러니 왜 이것이 예술로서 지각되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큐레이터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오늘날 전시회에 가서 우리는 직접적으로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큐레이터의 개념이다. 요컨대 궁극적 예술가는 제작자가 아니라 큐레이터이며, 그의 선택 행위이다. … 결단의 행위가 이유들의 사슬에 스스로 근거할 때, 그 행위는 이 이유들을 언제나 사후적으로 ‘채색’하며 그리하여 그 이유들이 결단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예컨대 자신의 믿음의 이유들이 이미 믿기로 결심한 자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신자(信者)들에 대해 생각해보라.

건물은 그저 텅 빈 전시장에 불과하다. 그것이 결혼식장이 될지 요양병원이 될지는, ‘건물주’라는 큐레이터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그저 텅 빈 전시장에 불과하다. 그 속에 큐레이터인 당신을, 나는 무던히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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