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스트  임종건]

민주당과 국민의힘 당헌을 들추어보았다. 정당들이 저마다 자기 정당의 헌법이라며 만든 당헌당규에 얼마나 번드르르한 말들을 늘어놓았을까 하고 생각해온 터라, 솔직히 말해 평소 여기에 이렇다 할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내가 당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로지 민주당이 내년 4월에 치러질 서울 부산시장 선거에 후보를 내기 위해 당헌을 바꾸려고 전 당원을 상대로 당헌개정 여부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하기야 지난 4·15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꼼수 위성 정당인 비례연합당을 만들 때도 전당원 투표를 이용했다. 당시 야당이던 미래통합당의 꼼수 위성 정당 창당에 대해 온갖 비방과 조롱을 퍼부었던 터라, 자신들도 같은 짓을 따라 하게 된 현실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이번에 민주당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당헌 제962항에 규정된 선출직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하여 재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후보추천을 하지 않는다는 재·보궐선거 특례조항이다

사진=민주당 홈페이지 캡쳐
사진=민주당 홈페이지 캡쳐

이 조항을 놔둔 채 서울 부산 시장 재선거에 후보를 추천하자니 염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조항에다 단 전 당원 투표로 후보 추천을 달리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아 어물쩍 넘어가려는 계산이다.

민주당의 이런 후안무치를 논하기에 앞서 여야 두 정당의 당헌을 읽어 본 소감부터 말해야겠다. 예상대로 두 당의 당헌은 미사여구의 전시장이었다. 다만 표현의 현란함에서 민주당은 국민의힘에 비해 월등하게 앞선 느낌이었다.

민주당은 당헌 앞에 강령을 따로 두었고, 거기에는 헌법의 전문을 흉내 낸 전문(前文)도 있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정한 사회, 누구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한 사회, 모든 사람의 권리가 존중되고 함께 사는 포용 사회, 양극화가 해소되고 삶이 풍요로운 번영된 나라, 튼튼한 안보와 남북교류협력을 통해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시대를 열어 가겠다’.

민주당은 강령과 116조의 당헌 외에 당규와 윤리규범을 따로 두어 당 운영의 공정의무와 당원들의 청렴의무를 세세히 규정하고 있다. 민주당의 강령과 당헌 당규가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법했다.

이에 반해 국민의힘은 모두 101개조로 된 당헌 당규 외에 윤리강령 등을 두고 있다. 강령에 해당하는 당헌 제2목적자유 민주 공화 공정의 가치를 실현하고, 북핵의 위협을 제거하며, 앞선 세대의 성취를 존중하고, 미래 세대와의 연대를 중시한다고 돼 있다. 북핵 위협의 제거를 명시한 점과 앞선 세대의 성취를 존중한다는 것 정도가 민주당과 다른 점이긴 하지만 정치적 수사(修辭)라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다.

어찌보면 민주당 당헌 제962항은 두 당의 차이를 가르는 결정적인 조항이었다. 이 조항이 없다면 두 당의 당헌 당규는 사실상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조항만 지킨다면 민주당은 그런 조항을 두지 않은, 어쩌면 둘 생각도 없는 국민의힘보다 확실하게 도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조항은 2015년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 시절 당헌개정으로 신설된 것이었다. 문 대표는 그해 경남 고성군수 재선거 유세에서 나서 당시 새누리당에 대해 재선거의 책임을 지고 후보 추천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이 문 대통령과 민주당으로선 다른 어떤 약속보다 이 약속을 이행하기에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민주당의 약속이행이 정당들로 하여금 공직선거 후보자 선정과 선출된 공직자의 업무 수행을 엄정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정치에 대한 땅에 떨어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선거제도 발전에도 기여가 됐을 것이다. 그것은 시도지사 한두 사람 잃는 것보다 가치가 큰 국민에 대한 봉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전당원 투표라는 결과가 정해진 절차를 통해 86.6%의 찬성으로 당헌개정을 밀어붙였다. 100% 찬성이 아닌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후보를 내서 심판을 받는 것이 공당의 책임 있는 자세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승산도 없이 당헌 뒤집기를 할 리는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 오거돈 부산시장 성범죄사건 이전에 같은 혐의로 안희정 충남지사가 사퇴한 후 치러진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 환영이 어른거리기도 할 것이고, 두 곳 모두, 아니면 최소한 서울 시장선거만은 자당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유권자들은 선출직 공직자들의 중대범죄 혐의로 재선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있다. 해당 선거에 해당 정당이 후보자를 내지 않는 것은 물론 선거에 들어간 비용을 세금이 아니라 부적격 후보를 공천한 정당에 물려야 한다는 것이 절대다수 국민의 요구이다. 이번에 두 선거에 들어가는 비용만도 8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민주당이 단서 조항을 달아 당헌개정을 하려는 것은 앞으로도 무수한 재·보선 또는 무수한 거짓말에 대해 무수한 전 당원 투표를 하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괜히 혼자 깨끗한 척했음을 사과하고 당헌 962항을 이번 기회에 삭제하면 솔직하다는 얘기는 들을 것 같다.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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