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스트  이호준]

2년 가까이 지내온 사찰을 떠났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때‘가 된 것이지요. 제가 절에서 나온다니까 걱정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국에 밥이라도 먹여주는 곳에 그냥 머물지 왜 내려오느냐는 걱정부터,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는데 그나마 청정지대에 있는 게 낫지 않느냐는 고언까지 많은 말들이 교차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SNS에 “생을 유목하는 자의 숙명”이라고 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역마살을 타고난 사람은 곧잘 안정을 내려놓고 유랑을 택하는 것으로 살아있음을 웅변하니까요.

쓸데없이 서론이 길어졌네요. 한 개인이 산에서 내려오는 일이 세상 돌아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산을 내려오기 전에 인근 도시에 작은 사무실 겸 숙소를 얻었습니다. 절과의 인연이 다하지 않아서 근처에 머물며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짐을 꾸리기 전 맨 먼저 한 일은 이사 갈 곳에 인터넷을 신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을 써서 보내야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 중 하나니까요.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이사 하루 전날 KT 통신사에 설치 신청을 했고, 일 때문에 빨리 설치됐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함께 했습니다. 그날이 8월 27일이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는 “요즘 바쁘긴 하지만 특별히 부탁해서 다음 날 설치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척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습니다. 기사들이 너무 바빠서 다음 날은 도저히 설치를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리는 하루 이틀 일을 못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열심히 따지고 있었습니다. 언제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9월 10일까지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 넘게요? 신청할 때 일이 급하다고 설명했고 거기에 동의해서 내일 설치해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즘 기사들이 너무 바빠서요. 그쪽 방향으로 배정이….”

기가 막혀서 따졌지만 마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계음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이사 갈 건물에 혹시 인터넷을 빨리 설치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일이 밀려있어서 마음이 급했습니다. 다행히 그쪽에서 한 사람을 연결해줬습니다. 그 건물을 관할하던 M사 설치 담당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내일 이사 하는 시간에 맞춰 설치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먼저 통화했던 곳에 전화를 걸어 10일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설명한 뒤 접수 취소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신청과 달리 취소는 사막을 횡단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그쪽에서는 제가 지치기라도 바라는 듯 몇 번 전화를 했습니다. 점차 설치 가능 날짜가 당겨지더니 종내는 다음 날 설치해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화가 나서 못을 박았습니다.

“내일 해줄 수 있는 걸 10일 이후에나 해주겠다고 한 건 뭡니까? 그냥 취소해주세요.”

결국 오후 6시부로 취소 처리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통화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다음날 짐을 옮기는 중에 인터넷 설치 기사가 왔습니다. 그분이 작업을 하다 말고 전화를 받더니 제게 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쪽에서 통화 요청을 한 모양입니다. 전날 저와 통화했던 그 직원이었습니다. 첫 마디가 ‘불법’ 운운이었습니다.

“그쪽은  불법영업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예? 불법이요? 같은  KT 사인데   불법이라니요?”

그 순간 옆에서 듣던 기사가 전화를 달라더니 고객에게 불법 어쩌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막무가내였습니다. 회선승인(?)을 할 수 없으니 당장 작업을 멈추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하던 직원은 손을 놓고 작업지시를 내린 쪽에 전화를 해보더니 한숨만 푹푹 쉬었습니다.

“대체 뭐가 문젠데요? 기사님, KT사 직원 아니세요?”

“그럴 리가요. 공식적인 작업지시를 받고 왔는데요. 일종의 영역다툼이에요. 신규 설치를 유치하면 혜택이….”(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대충 알 것 같았습니다. 직원끼리 과당경쟁의 파편이 튄 것이지요. 결국 그 기사는 몇 시간 고생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개통됐던 인터넷은 말도 없이 끊겼고, 일이 급한 저는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설치된 회선을 끊다니요. 회선을 끊기 직전에 KT 사에서 제게 문자를 보냈더군요. ‘개통희망일 : 2020-08-28’ ‘취소 접수일 : 2020-08-28‘ 이게 무슨 소리? 저는 분명 27일에 취소를 요청했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28일 오후 4시까지 취소처리를 안 했던 것이었습니다. 제 눈으로는 분명 소비자 기만이었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래도 이를 악물며 참았습니다. 정말 인터넷 설치가 급했거든요.

건물 관계자를 통해 신청했던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그 직원도 난감했겠지요. 결론을 말하면 본인이 직접 와서 설치를 해주고 갔습니다. 처음 제 전화를 접수했던 직원에게 유치 실적을 넘겨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적‘을 넘겨주는 것으로 난제가 금방 해결된 것이지요. 거기에 소비자 ’따위‘는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국가 기간산업이기도 한 통신을 담당하는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제가 순진해서 그렇다고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저만 모른다고요? 바로 그겁니다. 저만 당하는 일이 아닐 거라는 것.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겨자를 먹을까요?

칼럼도 못되는 글을 길게 쓰는 이유는, 제가 당한 일을 고자질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횡포를 당한 게 분명하지만, 특정인의 징계를 요구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작은 단초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통신사 경영진이 이 글을 보고 한 번쯤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속내도 굳이 숨기지 않겠습니다. 물론 과도한 기대라는 것도 압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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