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칼럼니스트  도영인]

몇 주 전에 <카일라스 가는 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할머니라는 통상적인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팔십대 중반의 한국여성이 주인공이다. 러시아와 중국 등 여러 나라의 험난하고 추운 고산지역을 거쳐 드디어 티베트 고원에 자리한 카일라스 성산(聖山)을 가까이에서 바라본다는 이야기이다. 카일라스 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 유명한 지역은 전 세계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카일라스에 근접한 산봉우리까지 오르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하는 곳이다. 필자가 본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한국 여성주인공은 드디어 신비스럽게 눈 덮인 카일라스 산 정상을 올려다보며 부처님께 눈물로 감사드린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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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 정치인, 노벨수상자,스포츠 선수의  '삶의 정상이란? '

사람은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목적을 정하고 그 바라던 일을 이루었을 때 희열을 느낀다. 어떤 유형의 값어치가 되었든 흔히 세상에서 인정하는 다양한 형태의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빌게이츠,이데이 노부유키,  스티브잡스, 정주영, 이건희, 구본무등 부(富)의 정상에 오른 글로벌 기업 총수, 학자로서 최상의 명예를 얻은 노벨수상자,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가 등 세상살이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성공한 사람의 모양새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자기 나름대로 정상으로 알고 추구해 왔던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아정체성과 관련이 없었다면 어떨까? 이 세상 최고의 재벌대열에 자랑스럽게 들어간 사람이 죽음의 시간에 이르러서야 이생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고 깨닫는다면 그 허탈함이 얼마나 클까? 스포츠계에서 쟁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인 세계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고 나서 더 이상 오를 정상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처음 금메달을 손에 넣었을 때의 황홀감을 얼마나 오래 간직할 수 있을까?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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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정한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만약 내가 내 뜻이 아닌 타의에 의해 움직였거나 비자발적으로 원시적인 충동에 휘둘리며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정상에 오른 것이 아니다. 설사 자신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목표나 정상을 향해 성실하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하여 이룬 성취라고 해도 그 화려한 외적인 성공이 행복한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궁극적인 만족감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진정한 의미를 주는 만족감은 내면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정상에 가까이 다가갈 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아, 즉 내 안에 숨어있는 큰 자아(Self)가 부르는 영혼의 소리를 알아채는 순간들이 있다. 그 아름다운 영혼의 파장에너지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두려움은 생명의 활력 앞에서 아무 힘도 못 쓰는 삶의 그림자일 뿐이다.  비록 세상 기준으로 눈에 뜨이는 성공은 아닐지라도 진정한 영혼이 갈구하는 자신만의 삶의 정상에 오르려고 평소에 애쓰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자살의 충동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의 자살사건이 유별나게 큰 관심을 끄는 것은 남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의 자리에 오른 사람에게도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을 대중에게 새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소위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도 세속적인 성공을 통해서 궁극적인 삶의 만족감이나 지속적인 평화로움을 느끼기 어렵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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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물질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이 세상살이에서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자기만의 성취감을 맛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구는 초월적인 큰 자아(Self)가 아니라 대부분이 작은 나(self), 즉 에고(ego)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지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정의한 이 에고는 인간심리가 작용하는 중심이고, 나로 하여금 모든 세상일에 관여하도록 하는 삶의 원리는 보통 이 에고에서 출발한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이 소아적인 삶의 패턴을 극복하고 진정한 나만의 정상의 자리에 다가가서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구십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카일라스 산 정상을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 영화의 주인공이 만약 나라면 어떨까를 감히 상상해본다.

필자는 지금 여기 내게 주어진 아늑한 아파트 서재의자에 편안히 앉은 채로 만약 내가 그 눈 덮인 고산지대의 얼음 바위에 앉아 최상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려면 어떤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신체적 건강과 심리적인 자신감 그리고 삶의 의미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깨어있는 영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신비스럽도록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다! 사람 모습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온전함을 지지해주는 우주적인 사랑에너지가 기적처럼 현존한다! 

몸, 정신, 영혼과 영성 이 네 가지 성공의 필수요소들이 조화롭게 아우러질 때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자발적으로 추구하는 정상의 자리에 다다르는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럴 때 이름 없는 평범한 한국 할머니도 영적인 의미를 갖는 정상을 향한 마음으로 평생 살아온 자신의 삶 속에서 숭고한 내면의 힘을 느끼게 된다. 불굴의 우주적인 사랑에너지를 느끼며 순수하게 솟아나는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제아무리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평소에 이성적인 사고력을 발휘해 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중심적인 생각의 패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개인의 심리적인 중심에 자리한 에고는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사람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에고(ego)가 원하는 대로 소아적인 결정을 수시로 하면서 살아가는 필자는 평상시에 과연 얼마나 선하고 건강하고 좀 더 성숙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시월상달로 불리는 이 계절에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필자는 완숙한 홍시처럼 짙은 진정성으로 빛나는 삶의 정상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필자를 포함하여 이 세상 누구나 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삶의 정상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결국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있어서 삶의 정상은 죽음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온갖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다 누리고 산 기업가도 죽음이라는 삶의 정상에 맞서야 한다. 쑤시고 아픈 몸의 고단함과 친숙한 상태에서 평생 가난을 옷 입고 살아온 평범한 여인에게도 그 영혼이 마침내 겪어내야 할 죽음의 순간이 온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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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여정을 걷는 모든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는 죽음 앞에서 한결같이 평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잠재능력으로서의 삶의 정상은 죽음 앞에서 느끼는 평안함이 아닐까?

죽음의 위협도 초월하는 영혼의 평안함

필자는 죽음의 위협까지도 초월할 수 있는 영혼의 평안함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삶의 정상이라고 생각해 본다. 2020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탈도 많고 시름도 많았던 한 해의 온갖 고통과 기쁨을 추수하는 계절 이 늦은 오후시간에 아직 어스름하게 남아있는 햇빛이 춤추고 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도영인

한 영성코칭연구소장
영성과 보건복지학회 고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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