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의 신세계 구상

<시대가 바뀐다, 우린 안 바뀐다>

<시대가 바뀐다, 우린 안 바뀐다>는 것은 19세기 말 조선에서 했음직한 말이다. 그래서 조선은 망했다. ()나라도 망했다. 일본만 시대변화에 맞추어 바뀌었다. 결국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고 중국을 침략했다. 지금은 어떤가? 우린 시대변화에 따라 바뀌고 있는가? 도대체 오늘날의 시대변화는 무엇인가? 코로나19가 초래한 변화인가? 4차 산업사회가 시대변화인가? 아니다. 이런 기술적 변화가 아니다. 더 엄청난 변화가 있다. 우리 사고방식의 변화다. 만사를 <투쟁>으로 보지 말고 <상호의존(相互依存)>, 즉 협력/상생(相生)으로 보는 변화다. 나는 이 시대변화가 신()의 뜻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제 2의 조선이 된다. 적응하면, 우린 투쟁의 역사를 넘어 신()의 신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인류역사에 방향(方向)이 있는 걸까? 인간계(人間界)에 대한 ()의 생각이 있는 걸까? 나는 있다고 본다. 만약 없다면 인류는 역사의 우연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셈이 된다. ‘홈리스 인류.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신의 뜻을 찾는 것이다. 역사의 큰 흐름(저류)’을 찾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직관에 의해 역사의 대세를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우린 역사를 바꾸는 큰 흐름을 못 본다. 눈앞의 것만 보는 버릇 때문이다. 신문/TV의 잡다한 보도는 역사의 대세를 보는 데 방해물만 된다. 신문/TV를 보지 말고 자신의 <직관과 통찰>을 믿자. 그러면 역사의 저류와 미래가 보인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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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를 뒤집고 있는 최대의 역사적 흐름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주저 없이 투쟁에서 상호의존(相互依存)으로 가는 변화라고 말한다. 인류역사는 투쟁의 역사였다. 투쟁이 생존과 번영의 법칙이었다. 투쟁 잘하면 흥하고 투쟁 못하면 망했다. 그런데 이 투쟁의 법칙 내지 시스템이 바뀐다는 것이다. 투쟁 대신에 상호의존이 성공법칙이 된다는 것이다. “같이 잘 살아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사에 전례가 없는 혁명이다. 공룡을 멸종시킨 시대변화와 맞먹는 개벽(開闢)이다. 공룡이 멸망했듯이 아무리 막강한 강대국이나 재벌이라도 이 새로운 룰에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나는 이것이 신이 구상하는 신세계라고 믿는다.

신은 왜 처음부터 완벽한인간세계를 만들지 않았을까? 신은 완벽한 인간세계는 따분하다고 보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정형(定型)적인 신의 세계를 강요할 생각도 없으셨을 것이다. 인간이 싸우기도 하고, 욕심도 부리고, 나쁜 짓도 하는 등 시행착오를 하면서 이른바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가다가 스스로 깨닫고, 영웅/천재가 나와 모범을 보이면서, “스토리 있는 신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을 희망하셨을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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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창조는 신()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일반 동물의 창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벤처였다. 신은 이와 관련하여 일종의 임상실험(臨床實驗)을 하셨다고 생각된다. ()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셨다. 서로 미워하고, 약탈하는 짐승 같은 세계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지상천국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공산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자본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전쟁을 선택할 수도 있다. 독재자를 지도자로 선택할 수도 있다. 이른바 방임(laissez faire)’이다. 그러나 신의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기본방향에 대한 장기적 구상은 있을 것이다. 사소한 일들은 다 방임하지만 장기적인 시야에서 인간, 지구, 우주 역사의 큰 방향을 잡아주고 계실 것이다. 나는 신이 마음먹고 바로잡으려 하신 첫 번째 목표가 인간의 <투쟁의 버릇>이었다고 본다.

신은 한정된 자원, 식량을 나누는 방법으로 투쟁을 택했을 것이다. 동물의 세계의 생존법칙을 인간에게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욕심과 두뇌를 과소평가했다. 사자도 배가 부르면 먹이감이 지나가도 무시한다. 그러나 배가 불러도 공격하는 것이 인간이다. 동족을 죽이고 약탈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자유롭게 투쟁하게 하면 인간이 다 먹는다. 자연이 파괴된다. 기후변화를 가져와 지구와 인간계(人間界)를 파괴할 수도 있다. 투쟁은 인간계 전체에 불행과 멸망을 가져올 구 있다. 이러한 우려가 신의 인간계 재편 구상을 촉진했을 것이다.

신은 인간의 투쟁 버릇에 실망하신 것으로 보인다. 끊임없이 투쟁/전쟁을 하고, 노예제도를 만들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또 착취했다. 신은 예수를 보내 반() 투쟁 패러다임(사랑)을 제시했지만, 인간은 예수의 가르침을 투쟁의 패러다임으로 금방 바꾸었다. 종교전쟁을 일으키고 종교가 침략의 도구가 되었다. 계급지배를 없애기 위해 민주주의를 전파시켰더니, 신 기득권층이 나타나 민주주의 자체를 투쟁과 지배의 수단으로 만들었다. 싸움하지 말고 돈 벌이로 승부하라고 자본주의를 전파시켰더니 돈을 놓고 인정사정 볼 것 없는투쟁이 전개되었다. 투쟁에 관한한 인류는 진화에 실패한 종()이다. 인간은 투쟁에 중독되면 왜 투쟁하는 줄도 모르는 채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한다. 인간들은 저마다 불만이고 활짝 웃는 사람은 드물다. 인간은 신이 준 모든 좋은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도외시하고 돈과 투쟁에만 빠져서 산다. 신은 이렇게 멍청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지 않았다고 한탄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투쟁 버릇을 응징하고자 천벌(天伐)을 내렸다. 양차의 세계대전으로 인류의 종국적 멸망을 경고하기도 했다. 인간의 욕심에 착안하여 대공황이라는 벌도 내렸다. 다 소용없었다. 인간은 잠시 반성하는 듯하다가 다시 옛 버릇(욕심과 투쟁의 버릇)으로 되돌아갔다. 쪼잔한 눈앞의 욕심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투쟁을 계속한다. 그래서 신은 이번에는 전쟁이 아닌, 전혀 새로운 대안(代案)을 시도했다. 강구하기로 하셨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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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다른 대안<상호의존(相互依存)>이다. 투쟁의 세계를 상호의존의 세계로 바꾸려는 것이다. 투쟁하면 못 살게만드는 것이다. 반칙과 투쟁을 일삼는 쌈닭들은 시대에 맞지 않는 생물이 되어 도태되고 함께 살 줄 아는착한 인간은 잘 살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성공하려는 이기적 동기에 따라 점점 투쟁을 멀리 하고 상호의존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5천년 투쟁의 역사가 종식되고 상호의존의 새 역사가 밝는 엄청난 역사의 개벽이 일어난다.

투쟁은 인류의 불행을 초래한 주범이다. 인간은 엄청난 피를 흘리면서도 이 주범을 퇴치할 방안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학자들은 투쟁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면서... 이 인류 최악의 병()에 대한 치료약을 만들 시도도 안 했다. 투쟁의 퇴치보다는 투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궁리하는데 열중했다. 결국 인류 스스로 투쟁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신()이 답을 주셨다. ‘상호의존이 답이다. 인류 스스로 진화하지 못하고, 신이 진화의 열쇠를 준 셈이다. 엄청난 신의 선물이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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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상에 따라 신()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상호의존을 조용히 세계에 침투시켰다. 상호의존의 증거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욕심 많은 정치인이나 부패한 재계 인사가 감옥에 가는 것을 흔히 보지 않느냐? 상호의존의 효과다. 그러나 투쟁에 깊이 중독된 인간들은 상호의존을 믿지 않는다. 특히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투쟁해서 망한 사람은 보지 않고 성공한 사람만 본다는 것이다. 쌈닭들이 망하는 사례를 그리 많이 보고도... 여전히 불나방처럼 투쟁에 뛰어든다. 대통령, 국회의원에 목숨 걸고 출마한다. 인류사 5천년의 타성이 그리 쉽게 극복되겠는가?  

오늘의 시대에는 투쟁과 상호의존이 공존한다. 장기적으로 투쟁과 상호의존 중에 어떤 쪽이 승자가 될 지는 명백하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쪽이다. , 상호의존이다. 그러나 과도기 중에는 구질서인 투쟁과 신질서인 상호의존 간의 갈등이 계속될 것이다. 요즘 포퓰리즘 세력은 민중의 이기심과 투쟁적 타성을 이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투쟁을 한다. 이들이 대표적인 상호의존의 적()’이다. 이런 갈등은 시저나 예수 같은 <영웅>이 나타나 제 2의 인류사로 이끌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결국 미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세계는 이리로 갈 것이다.

 

서용현, Jose

 30년 외교관 생활(반기문 전 UN사무총장 speech writer 등 역임) 후, 10년간 전북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중.

 저서 <시저의 귀환>, <소통은 마음으로 한다> 등. 

‘서용현, Jose’는 한국이름 서용현과 Sir Jose라는 스페인어 이름의 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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