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스트  임종건]

지난 1025일 작고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어록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된 것을 꼽자면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모두 바꾸자정치는 4, 정부는 3, 기업은 2일 것이다. 앞서의 것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삼성 임원간담회 발언이고, 뒤의 것은 1995년 베이징 특파원간담회 발언이다.

베이징 발언으로부터 25년이 지난 오늘 이 회장이 매긴 세 분야의 등급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우선 기업을 보면, 아직 2류에 머물고 있는 기업들이 다수라고는 하지만 1류로 도약했거나, 도약 중인 기업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삼성의  대국민 사과문, 1류 지배구조로의  발돋움

삼성이 1류 기업이라는 사실은 세계가 인정하는 그대로다. 매출과 기술에서 만이 아니라 이제는 지배구조에서 1류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5월 발표한 경영권 승계와 노조 문제와 관련한 대국민사과문이 그 시작이다. 그는 삼성이 성장과정에서 법과 윤리를 엄격하게 준수하지 못했음을 시인하고 반성했으며 앞으로는 법을 어기는 일은 결코 하지 않고, 편법에 기대거나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일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으며 더 이상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대물림 경영을 공개적으로 포기한  최초 사례

이는 한국의 대기업 중에서 대물림 경영을 공개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사례이다. 그동안 삼성의 지배구조가 한국의 모든 기업들에게 모방 사례가 되었듯이, 삼성의 새로운 지배구조 또한 다른 기업들의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2류 기업들을 대거 1류 기업 반열로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3류 정부는 어떤가? 아직도 많은 분야에서 3류를 벗지 못한 부분이 많아 보이지만, 2류 또는 1류로 도약하는 분야도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올 들어 세계로부터 찬사를 듣고 있는 한국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이다.

 이전 정부의  경험적 자산은  '성공적  K 방역'의 토대

한국의 코로나19 방역대책은 환자에 대한 검사, 감염경로 추적, 격리, 치료 등에서 기민하고 효과적인 대응도 있었지만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두기, 손 씻기 등 정부의 방역 조치에 호응한 국민적인 협조의 덕분도 컸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이전에 발생했던 메르스, 사스, 조류독감 등의 감염병 사태를 통해 축적된 방역능력이 발휘됐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정부의 기능은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발전한다. 이전 정부의 성공은 물론 실패까지도 자산이 된다

지금의 성공적인 방역정책도 그런 토대 위에 있다는 것을 정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전 정부에선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일은 아니다. 해외로부터 선진적인 정부 운영의 제도와 기술을 습득하는 노력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세계적 표준  'K 방역, 투개표 관리 시스템' 은 1류 정부로 가는 길

K 방역이 세계의 표준이 된다면 한국은 전자정부 분야에 이어 1류 정부 분야를 하나 더하게 된다. 투표가 실시된 113일로부터 보름이 넘도록 지리멸렬한 미국 대선의 투개표 상황을 보며, 투표 하루 안에 마지막 투표 한 장까지 완벽하게 처리해내는 한국의 투개표 관리의 우수성을 확인한다. 이 역시 1류 정부로 향하는 역량 축적의 예로 자부할 만하다.

 사진=네이버 캡쳐 (KBS 뉴스)
사진=네이버 캡쳐 (KBS 뉴스)

문제는 4류 정치다. 1류 정치의 요체는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교체다.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1류 정치의 요체인 것은 그래야만 보복이 없는 정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한국은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의 교체와,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부로의 교체,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탄핵으로 물러난 뒤 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각각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불행하게도 문재인 정부는 1류 정치로 갈 수 있는 그런 소중한 경험과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집권하자마자 적폐청산이란 이름의 보복 정치에 들어갔다. 정치 보복의 범위는 그 이전의 어느 정권교체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광범했다. 직전 대통령 두 명을 비롯, 전직 대법원장, 전직 국정원장 등 수 많은 공직자들이 구속됐다. 그 중 일부는 당국의 무리한 수사에 항거하며 자살하는 사태도 빚어졌다.

지난 4·15총선에서 180석이라는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이후 집권세력의 독주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국회에선 모든 상임위원장을 여당이 독차지한 채 일방적 법안처리가 일상화됐다. 사법부의 경우도 진보성향의 판사들로 대법원이 장악된 뒤 이전에 종결된 사건들을 집권세력의 입맛에 맞추어 뒤집는 판결을 예사로 한다.

그들은 지금 권력형 비리 수사를 책임진 검찰총장을 몰아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은 아예 검찰총장을 몰아내는 것이 검찰개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이 현 집권세력에게 집권의 계기를 만들어 준 이전 정부의 적폐 수사에는 박수를 쳤으나, 칼끝이 자신들에게 향하는 듯하자 견디지 못하는 형국이다.

이런 상태로 가다간 한국 정치는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부여당이 국내의 파트너와 대화도 못하면서 적대관계였던 북한과의 대화에 매달리는 상황은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한국의 4류 정치는 그대로이거나 더 미끄러졌을 것 같다.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