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의 한수, 상호의존

[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스트 서용현]

<상호의존>의 원리는 간단하다. 세계(나라, 사람)를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즉, 공동체(共同體) 또는 마을로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 내에서 나의 번영은 상대에게 달려있다. 상대를 해치면 나에게 손해가 돌아온다. 상호의존의 기본적 메시지는 “이제 투쟁으론 안 된다. 함께 잘 살아야 성공 한다”는 것이다. 영화 <미생>에서 투쟁적인 ‘성대리’가 성공하지 못하고 착한 ‘장그래’가 성공한다. 이것이 점차 현실이 된다는 얘기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사기 치고 약탈해서 평판이 나빠지고 왕따가 되면 돈도 못 벌고 성공도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인 폭스바겐사가 투쟁의 버릇(배기가스 조작) 때문에 흔들거리고 있지 않는가? 이런 것이 상호의존의 효과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신이 상호의존으로 가는 역사의 대 반전(反轉)을 초래하기 위해 동원한 주된 수단은 세계화와 정보화다. 세계화와 인터넷은 상호의존을 가속시키는 엔진이다. 특히 인터넷은 사람/나라의 평판을 세계에 전파시켜서 투쟁적인 사람/나라의 정체를 노출시키고 이기적인 사람/나라를 매장시킨다. 즉, 인터넷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투쟁의 시대를 조용하게 끝장내는 상호의존 왕국의 ‘투명의 기사(騎士)’다. 세계를 인터넷 이전 시대로 되돌릴 수 없듯이 상호의존의 대세도 돌이킬 수 없다.

정보화와 세계화 자체를 개벽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보화/세계화는 상호의존을 초래하는 ‘기술적 수단’에 불과하다. 반면에 상호의존은 ‘사고방식의 변화’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적 변화에 적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예컨대 “져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갖는 것은 새로 나온 스마트폰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즉, 상호의존이 정보화/세계화보다 어려운 시험문제다. 결국 사람/나라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세계화/정보화보다는 상호의존에 대한 적응 여부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상호의존은 절묘하다. 상호의존은 간단하면서도 직방으로 투쟁의 버릇을 다스린다. 이기적 동기(투쟁하면 망하고 상호의존하면 흥한다) 때문에 상호의존을 수용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다. 직접적으로 투쟁을 벌주지 않고 상호의존에 의해 간접적으로 투쟁을 다스리고 전쟁을 억제한다. 상호의존이 아니면 범죄 증가, 양극화,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비정 등을 일거에 해결할 대안(代案)이 있겠는가? 인간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대안이 있는가? 웃는 인간, 행복한 인간이 사는 세계를 이루어줄 마술(魔術)이 있는가?

상호의존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투쟁적 측면과 상호의존적 측면이 공존해왔다. 지난 5천년 역사는 투쟁이 주류였다. 그런데 신은 상호의존의 비중을 급격하게 늘려 상호의존이 주류 또는 ‘대세(大勢)’가 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크다. 이제 쌈닭의 인생관을 바꾸지 않는 사람/나라는 점차 “시대에 맞지 않는 생물”이 되어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5천년 투쟁의 역사가 종식되고 상호의존의 새 역사가 밝는 엄청난 역사의 개벽이 일어난다.

타성의 동물인 인간들은 투쟁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투쟁의 시대에 사람/나라들이 노상 싸우는 꼴을 보고 그리 생각한 듯하다. 삼국지(三國志)나 대망(大望)을 보면 인생/역사는 분명히 투쟁이다. 정말 투쟁은 인간의 본성일까? 그렇지 않다. 오랜 타성일 뿐이다. 토마스 홉스는 인간세계의 현실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struggle by all against all)”이라고 보았다. 호랑이 담배 피던 투쟁의 시대의 옛 이야기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정보화 및 상호의존의 대두를 보지 못하고 한 얘기다. 새 시대의 현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상호의존”이다. 홉스여, 안녕!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상호의존은 세계대전이나 대공황과 같이 천지가 뒤집히는 ‘요란한 쯔나미’는 아니다. “밤새 눈이 소록소록 내려서 세상이 바뀌었다” 식으로 조용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상호의존은 온건한 개벽은 아니다. 예수의 개벽처럼 결과가 혁명적이어야 개벽이다. 상호의존은 조용하게 다가와서 투쟁의 역사를 끝장내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상호의존은 인간 티라노사우루스들을 멸종시켜 투쟁을 추방하고 지구를 구할 개벽이다. 이 쯔나미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적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50년 후에도 미국은 여전히 강대국일까? 베트남은 후진국으로 남아있을까?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패러다임이 바뀌기 때문이다. 미국은 투쟁적인 나라다. 베트남은 상호의존적인 나라다. 과거에는 투쟁적인 사람/나라가 부자가 되고, 강대국이 되었다. 미래에도 그럴까? 상호의존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라/사람들은 이제 사나운(투쟁적인) 나라들보다는 상호의존적인 나라들을 파트너로 삼기 때문이다. 기술격차가 좁아져 사나운 나라 말고도 협력할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앞으로 펼쳐질 격변의 역사에서는 어떤 변화도 가능하다. 흥망의 순환도 빨라질 것이다. 불사(不死)인줄 알았던 강대국이나 거대기업이 흔들리거나 몰락할 수 있다. 새로운 별들이 혜성처럼 나타날 수 있다. 과거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북아메리카로 건너간 세계문명의 중심이 다시 아시아로 이동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50년 후 세계의 정치/경제지도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다. 투쟁에서 상호의존으로 가는 과도기에 얼마나 적응을 잘 했느냐, 즉 숙제를 잘 했느냐에 따라 국력에 큰 차이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50년 후에 보자.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상호의존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다. 다른 대안이 없다. 신의 생각을 추측하면 이렇지 않을까? : “인간들이 상호의존이라는 마지막 밧줄을 잡지 않는다면... 진짜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3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의 문명을 순진했던 시대로 되돌리거나, 신인류(新人類)를 탄생시키는 수밖에 없다. 몇 억년 걸리겠지. 그러나 나의 시간은 영원이니라.” 즉, 상호의존은 신의 마지막 구원(救援)의 제스처이자, 인간들에게 주는 최후의 당근이다. 

 

서용현, Jose

 30년 외교관 생활(반기문 전 UN사무총장 speech writer 등 역임) 후, 10년간 전북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중.

 저서 <시저의 귀환>, <소통은 마음으로 한다> 등. 

‘서용현, Jose’는 한국이름 서용현과 Sir Jose라는 스페인어 이름의 합성이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