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새 시대를 연다

[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스트  서용현]

새 시대를 구상하는 것은 신이다. 그러나 그 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영웅이다. 새 시대 탄생의 배후는 신(神)이지만, 집행자는 영웅이다. 오늘날 영웅은 신의 사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나는 영웅들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새로운 인류역사가 열릴 수 있나? “나비의 탄생 - 99퍼센트 깨어나다”라는 재밌는 동영상이 있다. 이 동영상은 인류 문명의 진화를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과정”에 비유한다. 애벌레의 사회는 물질문명이 지배한다. 탐욕과 돈이 지배하는 추악한 사회다. 애벌레들은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산다. 도대체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먹고 먹어도 행복은 없다. 늘 피로에 지쳐서 산다. 먹는데 열중하느라 행복에 중요한 ‘인간관계’와 ‘다른 가치’들을 버렸기 때문이다. 애벌레는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한다. 지구도, 인간성도 황폐해진다. 애벌레는 오늘의 인간계(人間界)의 모습이자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탐욕의 세계’의 모습이다.

이때 <영웅>이 나타난다. 이 영웅은 상호의존에 의해 조성된 ‘새로운 희망’을 현실로 바꾼다. 영웅세포는 전혀 새로운 시각, 미래상, 패러다임을 다른 세포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는 애벌레를 좀 더 아름답고 지속가능한 생명체, 즉 나비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는 기존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않고, 낡은 관념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열정과 사랑으로 무장한 “특별한 영웅”이다. 광선검을 든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터나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를 연상하라.

영웅의 인도 하에 인간들은 애벌레의 껍질을 뚫고 새로운 문명을 창조한다. 탐욕스러운 애벌레의 시대가 끝나고 아름다운 나비의 새 시대가 열린다. 이에 따라 짐승처럼 투쟁을 일삼지 않고, 게걸스럽지도 않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신 인류(humanity)’가 탄생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세계사의 고찰>을 인용했다: “역사는  

이   따금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 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개인에게는 보편과 특수, 멈춤과 움직임이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종교나 문화나 사회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존재다. 위기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에게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

뮤지컬 <헤어(Hair)>의 주제가인 <수족관에 햇빛을 들여보내 주세요(Aquarius/Let the Sunshine In)>도 비슷한 미래를 그린다. 이 노래는 세계가 조만간 ‘수족관의 시대’에 돌입하리라는 천문학적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수족관의 시대’는 “사랑, 빛, 인류애(humanity)”가 넘치는 시대다. 이는 인류가 물고기처럼 어둠 속을 헤매면서 서로 투쟁하고 잡아먹는 지금의 ‘물고기의 시대(Age of Pisces)’와 대조된다. 결국 이 노래는 투쟁의 시대에서 상호의존의 시대로 가는, 즉 애벌레의 시대에서 나비의 시대로 가는, 인류의 진화를 노래한다. 그러면서 이 노래는 밝은 수족관의 시대를 열기 위해 ‘빛’을 들여보내 달라고 기원한다. 영웅이 ‘빛’이다.

이러한 ‘나비의 꿈’은 ‘한 여름 밤의 꿈’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꿈을 추구할 용기만 있으면 모든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월트 디즈니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비의 꿈’을 나누어 가지면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인류의 새로운 희망’은 이루어질 수 있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건 한갓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Friedensreich Hundertwasser).” 

2천년 전에는 영웅 또는 성인(聖人)이 자주 나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예수, 석가 등등.. 그런데 왜 영웅이 멸종하였는가? 그렇게 교육을 많이 받고 공부를 많이 했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지식’에 치중하여 잔머리만 굴렸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직관(直觀)과 통찰을 가진 영웅을 기다리자. 이것이 인류의 희망이다.

 인류사 제 2기가 열린다

신이 상호의존에 의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지난 5천여 년 간의 ‘인류사 제 1기’를 끝내고 ‘인류사 제 2기’를 출범시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 인류사의 획기적 전환이 분수령을 지나고 있다고 본다. 시간이 감에 따라 권력 마니아들이 도태될 것이다. 대신 ‘영웅’들이 각국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들은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투쟁에서 상호의존으로 가는 인류의 장정(長征)을 선도할 것이다.

지난 5천년 인류사는 장구히 계속될 인간역사의 ‘작은 파편’에 불과하다. 인간들은 이 역사가 다인 줄 안다. 그러나 이 역사는 ‘인턴십’에 불과했다. 신(神)은 이 인턴십이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짐승의 역사였다. 만물의 영장에 걸 맞는 역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신은 상호의존에 의해 신이 꿈꾸던 세계를 재창조하려는 것이다. 즉, 본격적인 인류역사는 세계화/상호의존과 함께 시작될 것이다. 

결국 투쟁은 타성이다. 사람들은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새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보지 못 했기 때문에 투쟁이 필연이라고 보았을 뿐이다. 민주제를 못 본 사람들이 군주제가 필연이라고 본 것과 같다. 인류는 계속 이렇게 살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인간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투쟁은 인류사를 영원히 지배할 패러다임이 아니며, 인간은 각성만 하면 이 못된 버릇에서 벗어나 상호의존의 새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신(神)을 닮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보다 나은, 보다 멋진 역사가 가능하다. 이러한 진화를 신이 선물로 주셨다.

‘신의 나라’는 결국 “인간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나라”다. <신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 원효대사가 “일체는 마음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나 예수가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장21절)”고 하신 것은 이를 지칭한다. 욕심이 많을수록 지옥이 되고, 적을수록 천국이 된다. 기뻐할수록, 그리고 마음이 평화로울수록 천국이고, 얼굴 찡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지옥이다. 신이 바꾸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이다. 세상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투쟁에서 사랑(상호의존)으로 바꾸면, 우린 <신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사 2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갑자기 전 세계가 샹글릴라로 바뀐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의 세계’로 가는 장정(長征)이 시작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투쟁의 버릇에 집착하는 나라/사람은 점점 도태된다. 반면에 ‘신의 뜻’을 따라 상호의존적으로 사는 나라/사람은 역사를 선도한다. 신이 우리에게 준 것은 천국 자체가 아니다. 천국으로, 그리고 제 2의 인류사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세계화/상호의존의 새 역사 또는 새 시대의 모습은 아직 불분명하다.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벤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인도할 정확한 지도도 없다. 영화 <인디아나 죤스와 최후의 십자군(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에서처럼 엉성한 지도를 가지고 모험(고생)을 하면서 신세계를 답사해야 한다. 그게 재밌다.

샹글릴라를 향하여

나는 위에서 천국(신세계)으로 가는 길을 제시했다. 그것은 결국 투쟁이라는 악습을 털고 상호의존이라는 새로운 시대사조를 품는 것이다. 상호의존을 실천해 보아라.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를 들어보았는가? 마음만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인간의 행복은 ‘관계(關係)’에 있다. 그런데 우린 관계를 희생하여 쪼잔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들과 싸우고 남들을 해치면서 살아왔다. 투쟁은 역사가 인간에게 씌운 주술(呪術)이다. 귀신이다. 이것만 뒤집으면 된다.

투쟁에서 해방 되라. 그러면 너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 마음에 있다. 악인(惡人)이라고 처음부터 악했던 것은 아니다. 투쟁이 만연된 사회에서 이기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악인이 되는 것이다. 천국행 항공편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욕심과 투쟁심이 가득하여 ‘함께 살 줄 모르는’ 사람/나라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악인들에게 ‘함께 가자’고 하자.

선거사기 소송을 하겠다고 주접떠는 트럼프한테도 같이 가자고 하자. 그것이 상호의존이다. 상호의존하려면 관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용서는 바이올렛이 자기를 밟아서 부순 발꿈치에 흘린 향기와 같은 것이다 (Mark Twain).”   

천국행 항공편이 모자라면 이 땅에 샹글릴라(지상천국)를 건설하자. 그것이 진정한 ‘신의 뜻’이리라. 지상천국은 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사랑하면 지상천국이다. 그럴려면 “아무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상호의존으로 들어가는 ‘열려라 참깨’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남도 나를 미워한다. 그래서는 상호의존이 어렵다. 심수봉씨 노래 <백만송이 장미>는 샹글릴라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서용현, Jose

 30년 외교관 생활(반기문 전 UN사무총장 speech writer 등 역임) 후, 10년간 전북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

 저서 <시저의 귀환>, <소통은 마음으로 한다> 등. 

‘서용현, Jose’는 한국이름 서용현과 Sir Jose라는 스페인어 이름의 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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