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통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

[오피니언타임스= 청년 칼럼니스트  석혜탁]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전 국민의 입에 찰싹 붙어 있는 노래 가사이다. 하나의 관용어구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이 짧은 표현에 문제 제기를 할 생각조차 못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나의 소원’도 아니고 ‘우리의 소원’이라는데, 괜히 정색하고 다른 얘기해봐야 ‘우리’라는 안온한 무리에서 이탈되기 십상이다. 개인의 고유한 특질을 존중하기보다는 아직도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치명타다. 

또 ‘통일’이라는 단어 자체에 담긴 긍정적이고 절대적인 이미지에 반기를 들기 쉽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통일은 과제, 지향점, 최종 목표 등과 사실상 유의어였기 때문이다. 감성적인 부분과도 연결된다. 통일은 사회과학적인 쟁점이기도 하지만, 정서적인 갈구이기도 하다.

사진=픽사베이 (강원도 영월 -한반도 '축소판')
사진=픽사베이 (강원도 영월 -한반도 '축소판')

보수 정권에 비해 남북문제를 보다 슬기롭게 펼쳐 나갈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문재인 정부. 의미 있는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6개월 전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답답한 마음을 가득 안고 있던 와중에 한 정치학자의 글을 접하게 됐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으로 유명한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의 <한겨레> 기고문이다. 박 교수는 남과 북이 통일을 해야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 ‘따로’ 그러면서도 ‘평화롭게’ 살면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박명림  교수 (사진; 네이버 캡쳐)
박명림 교수 (사진; 네이버 캡쳐)

보통 우리 사회에서 통일에 찬성하지 않으면,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굉장히 점잖게 표현한 것이고, 극우주의자나 수구꼴통 혹은 토착왜구 소리를 듣게 된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여러 기준이 있을 터이지만, 북한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다소 기계적으로 이념 배치가 이뤄지곤 한다.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폭력적인 구획이다. 한데 주지하듯 박 교수는 국내에서 진보적인 사회과학자로 손꼽혀 온 인물이다. 그럼 그가 훼절이라도 했다는 것일까?

그는 이념통일을 지향했던 이승만, 박정희와 민족통일을 추구했던 86세대를 동시에 비판한다. 그렇다고 양비론을 펴는 것은 아니다. 이념동굴과 민족동굴에서 속히 헤어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한 뒤 국가 대 국가 사이의 평화 공존이 정답”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단일민족, 분단국가와 같은 표현도 ‘종족주의적 허구’라고 지적하며, 이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분단을 통일과 대응하려는 시도를 오류로 규정한다. 분단공존을 통해서 충분히 평화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맥락이다. 한국과 조선 두 국가의 평화공존은 통일의 ‘유예’가 될지 언정 통일의 ‘포기’는 아니라는 점도 명확히 하고 있다.

위에서 필자는 ‘통일’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절대선으로서의 이미지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거대한 담론일수록 언어의 감옥에 유폐되면, 정합적인 사유와 체계적인 논리 수립이 요원해진다. 이 대목에서 박 교수의 혜안이 더욱 돋보인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분단의 반대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다. 적대의 반대도 통일이 아니고 평화공존이다. 통일이 목적이 되면 언젠가는 한국전쟁처럼 통일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 통일 대신 평화가 목적이 됐을 때 끝내 통일폭력을 넘어 평화공존을 구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정치학자로 평가되는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도 남과 북은 이미 별개 국가이며, 이는 돌이키기 어렵다고 진단한 바 있다. (참고로 최장집 교수는 박명림 교수의 지도교수였다. 박명림 교수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마쳤다.) 최 교수는 외교의 목표로 통일을 고수하는 것에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해왔다. 물론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 주장에 반론을 펼치기도 했다. 

다시 박 교수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는 2018년 <중앙일보>에 게재한 칼럼에서 청년들의 혐북(嫌北)과 염북(厭北) 시각을 반공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런 얕은 진영논리로 바라볼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 참 가슴 뜨거워지는 말이다. 굳이 여기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까지 꺼내고 싶진 않다. 다만 단지 언어, 문화, 전통이 유사하다고 해서, 즉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통성이 결여된 세습 독재와 인권 유린이 자행되는 북한과 통일을 해야 한다는 명제가 청년들에게도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핏줄’, ‘혈통’에 집착하는 전근대적인 습속에서 벗어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기틀을 보다 굳건히 세우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리고 무게중심은 언제나 평화에 두어야 마땅하다. 이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은 평화’라고 외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평화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석혜탁sbizconomy@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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