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닭의 말로 (末路)

[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스트   서용현]

필리핀에 가면 투계(鬪鷄)가 성행한다. 거의 국민스포츠 수준이다. 사납게 보이는 쌈닭들은 다리에 칼날을 동여매고 앙칼지게 싸운다. 피가 막 난다. 승패가 갈리면 쌈닭 주인들은 자기 쌈닭을 데리고 나간다. 상(賞)이나 먹이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끓는 물에 넣어 닭도리탕을 만들기 위함이다. 승자던 패자던 상관없다. 이긴 쌈닭도 부상 때문에 다신 쓰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남는 닭도 있다. 애초부터 기가 죽어서 싸우려 하지 않는 착한 닭이다. 요즘 여의도는 투계장이다. 필리핀 투계 생각이 난다. 더 무섭다. 말이 칼날이 되어 되돌아온다. 이기는 측은 살아남을까? 이기든 지든 닭 주인 좋은 일 시키는 것은 아닐까? ‘닭 주인’은 누구일까? 서민들은 승자든 패자든 무서워하고 치를 떨지 않을까? 결국 “쌈닭에겐  내일이 없다” 아닌가?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한국 닭싸움에서는 말을 잘하면 ‘이기는’ 것인가? 나는 외교관을 오래 했지만 말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 못 봤다. 말을 절제하거나 참을 줄 아는 사람이 이긴다. 말을 막 하거나 많이 하는 사람은 왕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WTO회의에 참석할 때의 일이다. 말을 기막히게 하는 모 개도국 대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발언을 신청하면 각국 대표들이 회의장 뒤쪽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내가 옆자리 미국 대표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는 toilette time이라 하면서 “저 대사가 발언하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는 생리학적 충동이 생기는 모양”이라고 답했다. 말을 많이 하고 자신의 유식을 과시하는 데에 모두들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목계(木鷄) 우화’가 있다. 중국 주나라 선왕은 닭싸움을 좋아했다. 투계 조련사에게 닭을 갖고 와서 최고의 쌈닭으로 만들라 했다. 조련사는 열흘 후 “사납고 제 기운만 믿고 있어 멀었다”고 했다. 또 열흘 뒤 “다른 닭의 소리를 듣거나 그림자만 보아도 바로 달려든다”고 했다. 다시 열흘 후 “다른 닭을 보면 눈을 흘기고 교만하게 군다”고 했다. 40일째가 되자 조련사는 “이젠 다른 닭이 소리 지르고 위협해도 나무로 만든 목계처럼 동요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달아납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어눌한' 아들(이건희)에게 선물한 것이 목계였다 한다. 추미애 법무장관을 이 조련사에게 맡겨서 목계로 만들었다면? 그래서 침묵으로 노려만 보았다면? 국회의원들이 죄다 꽁지를 내리지 않았을까? 아쉽다.

투쟁의 시대는 갔다. 지금은 상생(相生)의 시대다.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요, 지는 것이 이기는 시대다. 지금은 말로 상대를 제압해서 설득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한번 뱉어놓은 말은 다시 담지 못한다. 기록장치가 사방에 있다. 말을 삼가야 한다. 고위공직자는 더욱 그렇다. 도덕경(道德經)에 “불언지교(不言之敎, 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나온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대답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하세요 (Think twice, before you answer)"라는 팝송도 있지 않은가?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