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고립’ 한 달

거든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해 영국의 블렉시트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jtbc 유튜브 뉴스 영상캡쳐
거든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해 영국의 블렉시트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jtbc 유튜브 뉴스 영상캡쳐

[오피니언타임스=양평 칼럼니스트]파리의 영국 식품마트인 막스앤드스펜서가 텅텅 비었다는 소식이  지난1월말에 들려왔다. 특색 있는 영국의 음식 맛을 보여주던 이 마트가 썰렁해진 것은 물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예상치 못했다. 유럽연합과 영국은 새해와 함께 발효된 브렉시트를 앞두고  양측의 상품 교역에는 종전처럼 무관세 방침을 이어가기로 협정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금은 매기지 않더라도 ‘외국’제품이니 통관절차는 거쳐야 한다. 따라서 지난날 이웃 도시에 가듯이 유럽에 들어 갈 수 있었던 영국 제품이 세관에서 복잡한 통관절차를 거치는 동안 변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포장된 음료수나 캔 같은 식품은 그런 절차를 밟고서라도 들어 올 수 있으나 샐러드나 샌드위치처럼 나름의 특색 있는 맛을 자랑하는 식품은 들어 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막스앤드스펜서는 폐업을 앞둔 점포처럼 썰렁해 파리 근교에만 20여 개의 매장을 둔 이 대형 마트가 존폐의 기로에 몰려 있다는 소식이다.

 그것은 브렉시트라는 엄청난 지각변동에 비하면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식품마트의 경우처럼 브렉시트를 추진할 당시에는 예상치 못할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리라는 것이다. 

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그처럼 기를 쓰고 단행했던 브렉시트의 밝은 면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연말연시 브렉시트가 발효하게 됐을 때 런던에서 일부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보여주었던 열광적인 환희의 분위기는 이제 기억에서도 사라지다시피 됐다.

영국이 2월1일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에 가입신청을 한 것도 어딘지 그렇다.

일본을 선두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베트남 싱가포르 브루나이 칠레 말레이시아 멕시코 페루 등 11개국이 가입해 있는 이 협정은 유럽연합과는 딴판이다.

유럽연합이 비좁은 유럽대륙에 촘촘히 박혀있는 나라들의 모임이라면 CPTPP는 태평양을 포위하듯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남북미 등 4대륙의 나라들이 두루 포진해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지난달 30일 “EU를 떠난 지금 영국인들에게 거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새로운 파트너십을 체결할 것”이라고 장밋빛 전망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브렉시트를 못마땅해 하는 이들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어딘지 ‘꿩 대신 닭’ 같는 느낌이 드는 곳은 어절 수 없다. 우선 영국이 CPTPP회원국 대부분과 무역협정을 맺었거나 협정이 마무리 단계여서 굵직한 변화가 없으리라는 점이 그렇다.

더욱이 CPTPP회원국 전체와 영국의 무역 규모는 EU와의 거래량과 비교할 수도 없다는 점을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점으로 돌아가서 영국이 그처럼 요란하게 브렉시트를 감행한 원인은 무엇일까?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 때문? 그건 아니다. 영국은 유럽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난민’이라는 말이 생소했던 반세기 전부터 유럽과 거리를 두려 했었다.

따라서 유럽과의 거리두기는 영국인들의 DNA같은 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멋있게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대영제국’이 위세를 떨치던 시절에는 그것이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 ‘고립’이란 말은 영국이 섬나라여서 생긴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섬나라라는 요인이 있지만 다른 섬나라들은 그런 호칭을 누리지 못해왔다. 그것은 다른 어느 섬나라도 ‘제국’이라는 명칭을 누리지 못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영국은 고대에는 바이킹 족이나 노르만 족은 물론 대륙으로부터 게르만 족인 앵글로 족과 색슨 족의 침략도 받았으나 근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대륙의 진흙탕 같은 분쟁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었다.

16세기에는 국교인 성공회를 창립해 로마 교황으로부터도 거리두기를 했고 그로부터 반세기 뒤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도버 해협은 한없이 멀고 깊어졌다.
그러다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의 기갑부대를 도버 해협에서 막아냄으로써 명예로운 고립은 한층 실감을 더했다.

그렇다면 고립이 그처럼 좋은 것일까? 물론 고립은 좋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영국은 고립돼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대륙으로부터의 흙탕물이 튀어오지 않는다는 의미의 고립일 뿐 영국이 대륙의 일에 손을 뻗치지 못한다는 뜻의 고립은 아닌 것이다.
아니, 영국은 유럽 대륙의 어느 곳에나 손을 뻗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지주가 소작인들이 엉켜 사는 동네와 떨어져 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소작인들의 거동에 수상한 점이 있으면, 다시 말해 대영제국의 안위에 문제가 걸린 일에는 손을 뻗쳐 미연에 막는 것을 능사로 했다.

 영국은 대륙에서 어떤 나라가 위협적으로 커나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런 영국의 심리를 잘 이용해서 득을 보는 수도 있었다. 독일을 통일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대표적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수십 개의 나라로 쪼개져 있던 독일의 통일에 영국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지만 방해만은 받지 않기 위해 영국의 그런 심리를 자극했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가 혼자서 저처럼 강세를 보이면 언젠가 또 다시 나폴레옹 같은 인물이 나와 유럽을 뒤흔들 수 있다. 따라서 독일이 통일돼 프랑스를 견제 하는 것이야 말로 대륙을 안정시킬 수 있는 묘책이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영국의 방조 하에 독일은 통일을 이뤘으나 그 독일이 세계적 제국을 꿈꾸며 해군을 증강시키자 영국은 1차 대전으로 철퇴를 내렸다.

하지만 독일 제국과 함께 영국의 명예로운 고립도 끝났다. 1차 대전은 유럽 세력이 아닌 미국이 나서서야 끝이 나서다.

1차 대전을 마무리한 파리평화회의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독무대처럼 비쳤고 그 국면에서 대영제국은 실종된 모습이었다.

그러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자 ‘미·소 대결’에 가리어 영국이라는 이름은 비치지 도 않았다.영국이 대영제국의 기억을 떨쳐버릴 수 없기에 유럽과의 거리두기라는 DNA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영국이 유럽 대륙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기질도 변치 않았다.  영국인들은 “대륙에 간다”고 하는 대신 “유럽에 간다”고 함으로써 영국이 유럽과는 별개의 국가라는 식으로 말하는 투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영국이기에 EU가 발족하던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나서기 보다는 관망자처럼 있다가 뒤늦게야 참가했으나 거기서 부딪친 유럽은 지난날의 유럽이 아니었다. 그래서 EU내에서도 유로 통화를 사용하는 대신 파운드 화를 계속 사용하는 등 “EU내의 고립‘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2차 대전의 패전국이던 독일에게도 경제적으로 추월당하자 영국의 자존심은 보이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영국은 EU를 탈퇴했고 회원국들은 아쉬워는 했으나 충격은 받지 않은 채 전송했다.
그것은 ’명예로운 고립‘과는 다른 ’외로운 고립‘의 모양새였다.

[저자약력]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

서울경제 문화부장 겸 부국장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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