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ytn 유튜브 뉴스 영상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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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타임스=칼럼니스트 양 평]중국이 지난 31일 한 부부 당 3자녀 출산까지 허용해 가혹한 산아제한을 사실상 폐지하다시피 한 것은 오래 전부터 예상돼온 일이다.

출산율이 줄어든 데다 노령화는 심해 ‘노대국’이 돼가고 있는 데다 세계최고 인구대국이라는 지위도 흔들리고 있어서다.그 문제를 중국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중국은 현재 ‘인구 문제의 3차 대전’에 직면해 있고 그 대전은 가장 어려운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1차 대전은 인구를 늘리기 위한 싸움이었다.

중국은 삼황오제시대부터 20세기까지 현대적 의미의 ‘인구 문제’, 즉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과는 담을 쌓고 채 살아왔다. 굳이 ‘인구 문제’를 찾자면 그것은 인구가 너무 적은 것이었다. 
 대가족제도의 중국인들은 자녀에 대한 욕심이 많아 나라에서 뭐라 할 것도 없이 많은 자녀를 두려 애써왔다. 

인구는 저절로 늘어나지만 전쟁이나 내란이  일어나면  줄어든다. 아니, 그 감소폭은  ‘몇 %’라는 잣대로 잴 수는 없고  ‘몇 분의 1로’ 감소했다고 말해야 하니 줄어들기 보다는 증발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래서 중국 역사에서는 큰 전쟁이나 내란이 난 뒤 인구가 10분의 1로 줄었다는 기록들도 눈에 띈다. ‘삼국지’라는 거창한 서사시가 거쳐 간 자리에서도 그런 비참한 상황이 벌어졌다.

중국의 인구학자 왕육민(王育民)의 ‘중국인구사’를 보면 ‘삼국지연의’가 시작되는 후한 영제 7년 (서기 184년), 즉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해에  5천500만이던 인구가 후한이 멸망하기 3년 전인 헌제 22년(217년)에는 1천500만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그 후 촉나라가 멸망한 263년에는 촉의 인구가 94만에  위의 인구는 537만, 그리고 오나라의 경우 멸망 당시(280년) 230만으로 3국을 합해 봐야 1000만도 되지 않았다.

 중국에서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전사자 때문이 아니라 아사자 때문이었다. 전쟁을 하다보면 치안이 불안해 도둑들도 극성스러운데다 그 도둑들보다 더 가혹한 관리도둑들이 날뛰어서다. 그 관리들은 군량미 같은 것을 징수할 때 실제 할당량보다 몇 배씩 받아 챙기는 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흉노와의 싸움으로 유명한 한나라 무제 때의 인구 동태는 새삼 눈길을 끈다.한무제 초기인 BC 134년 3천700만이던 인구가 한무제가 죽은 BC 87년에는 3천200만으로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흉노와의 싸움이 한참일 때는 인구가 그보다 더 줄었으며 그럼에도 한무제가 계속 흉노와 싸우려 했다. 이에  신하들이 “그동안의 전쟁으로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말하자 흉노 정벌을 중단했다. 따라서 그 인구수는 한무제 말기에 회복된 수치였다.흉노와의 싸움은 대부분 국경 너머에서 벌어졌으나 그곳과 먼 곳에 살던 백성들은 굶주리다 죽어간 것이다.그래서 큰 전쟁이 끝나고 나면 도시가 허허 벌판처럼 돼 인적이 비치지 않으니 역대의 통치자들은 영토보다 인구를 소중이 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영토를 중시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타이완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그러던 중국이 타이완을 차지하게 된 것도 영토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명이 망하자 반청복명을 내세운 정성공(鄭成功)이  전쟁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그곳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 무렵 타이완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거쳐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었던 것을 정성공이 빼앗은 것이다.중국이 진즉 타이완을 점령할 해군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바로 명나라 초기인 영락제 시절 환관인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약 30년에 걸쳐 대선단을 이끌로 아프리카까지 항해를 하기도 했다.이 선단은 무력도 갖추었기에 스리랑카의 왕을 쫓아내기도 했고 인도네시아 군대나 해적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이 당시에 부족국가 수준의 원시상태에 있는 타이완은 물론 그곳에서 100㎞ 너머의 오키나와도 가볍게 차지할 수 있었다. 실은 ‘오키나와’라는 이름도 그로부터 2세기 후에 일본이 차지하면서 생긴 이름으로 당시는 류구열도였다.명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중국은 인구를 탐했다.

명나라 말기 명과 청의 군대는 오랜 기간 산해관 부근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그 공방전에서 이긴 쪽은 적진으로 들어가 중요한 것을 약탈해 왔는데 그 중 가장 값진 것이 농민 등 사람이었다.그러다  청나라 시대가 되면서 중국은 인구도 영토로 넓어진다. 타이완이나 여진족의 거점인 만주가 자동적으로 편입된 데다 막강한 국력으로 신장과 티벳 지역을 정복해 영토를 두 배 이상 넓혔다.

동시에 인구도 크게 늘어났다. 그 요인으로는 청말의 아편전쟁까지 큰 동란이 없었던 데다 서양의학이 도입된 것 등을 들 수 있다.그래서 청말에는 4억으로 인구가 늘면서 중국의 인구 문제 1차 대전은 끝난 셈이다.20세기에 들어서 중국은 내란으로 인구 성장은 정체 상태였으나 중국이 1949년 통일된 시점에는 5억 인구로 올라섰다.

그래서 중국은 통일의 기쁨에다 인구대국이 겹쳐 경사스럽게 받아 들였다. 마오쩌둥은 인구증가를 매우 고무됐었다.하지만 마오의 사망 후에 인구가 10억을 넘어서 계속 늘어나자 중국 지도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맬서스의 ‘인구론’에 더 관심을 보일 정도로 긴장해 1980년대에는 1가구 1자녀 정책을 실시한다.

중국의 인구 문제 2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하지만 그 싸움은 너무 단기간에 끝나고 만다. 인구 감소를 목표로 한 부부가 자녀를 1명만 낳도록 한 정책이 비인간적인 것은 그만두고 여러 가지 부작용도 일어났다. 남아를 선호한 중국인들이 딸일 경우 낙태를 해서 남녀의 성비가 불균형이 되기도 했다.보다 큰 원인은 대가족제도가 허물어진 중국사회에서 자녀를 꼭 가져야 한다는 관념이 사라져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진 점이다.

그래서 2016년에 1가구 2자녀로 정책을 바꾸었으나 그것으로도 인구절벽이 해소되지 않자 3자녀로 확대한 것이다.드디어 중국의 인구문제 3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그것은 과거의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다. 그리고 중국만이 안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도 인구절벽에 부딪친 상태다.출산 자녀 수를 늘려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은 현상이다.그 이유를 두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젊은이들이 자녀를 기르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어서라는 게 주된 이유다.

하지만 지난날 중국에서는 극도의 가믐이나 전시 등으로 굶주려 인육을 먹을 때도 자녀들을 많이 출산했던 기억과는 맞지 않는다.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이 사라진데다 출산은 조물주의 명령이라는 듯이 무조건 자녀를 낳았던 인류의 성향이 바뀐 것이다.

중국의 인구 절벽이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세계 최대의 인구대국이 중국에서 인도로 넘어가는 과정이어서 이기도 하다.

사진= 양평 칼럼니스트
사진= 양평 칼럼니스트

양평 저자소개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 

서울경제 문화부장 겸 부국장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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