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sbs뉴스 유튜브 영상 영상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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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허승화] 영화 '더 파더'에 등장하는 앤서니(앤서니 홉킨스 분)는 젊음을 바쳐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는 삶의 끝에 이르러 치매에 걸린 탓에 눈앞에 놓인 상황과 머릿속 환상을 끊임없이 혼동한다. 그 와중에도 늘 자신의 살가운 둘째 딸과, 평생을 바친 ‘내 집’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한 평생을 바쳐 마련한 자기 집인데 딸이 빼앗아 가려고 한다는 식의 발언을 반복하며, 집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다. 영화는 안소니가 있는 집의 모습과 가족들의 얼굴을 매번 바꾸어 담아내며, 관객들도 안소니처럼 환상과 실제를 혼동하게 만든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실은 그가 계속 자기 집이라 우기던 그가 있던 공간은 요양시설이었다. 아버지를 런던에 남겨두고 파리로 떠나야 하는 딸 ‘앤’은 그를 요양시설에 맡겼고, 치매에 걸린 앤서니는 소중한 집을 떠나 요양시설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 요양시설을 자기 집으로, 그 안에 있는 직원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한 평생을 바친 ‘집’을 떠나 병상에서 마감하는 삶의 최후는 늘 슬프지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더 파더' 속에서 환상의 끝에 갑자기 마주한 ‘현실’은 그래서 비극적이다.      

집을 떠나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삶,  '노매드랜드'     
 여기 중년의 한 여자 ‘펀’ (프란시스 맥도먼드 분)이 있다. 도시의 경제적 붕괴로 인해 자신의 삶이 온전히 녹아있던 집이 이 세상의 지도에서 사라져 버린 여자다. 남편의 죽음에 이어 자신의 과거를 상징하는 공간인 집마저 주소도 없는 장소가 되어버린다. 그녀의 과거를 증명하는 것들은 사라졌다. 이제 그녀는 집을 버리고 길 위로 떠나 노매드 노매드(nomad): 유목민.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된다.  

이제 작은 캠핑카에 살기 시작한 그녀는 세상을 떠돈다. 아직은 육체 노동을 견딜 수 있는 몸이라 여러 단기 노동직을 전전할 수 있다. 길 위에서, 그녀는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갖고 길에 나온 노매드들과 스쳐간다. 그들은 그녀에게 정을 주고 함께 살자고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에 정착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멈추지 않고 이동한다. 지난한 노동과 이동의 끝에 그녀는 자신이 떠난 집을 다시 찾아간다. 그 집을 다시 보며, 그녀는 집을 떠나 거친 길 위에서 성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펀’은 이제 외면하려 했던 과거마저 끌어안은 듯 보인다. 펀이 지평선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영화 내내 세상에게 착취당하던 그녀가 그 순간 비로소 잠시나마 해방되어 진정한 노매드가 되는 순간이다.      

‘집’의 의미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결국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과 연결된다. 누군가는 일부러 집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 힘들게 마련한 집을 두고, 여생을 집에서 보낼 수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머릿속 가상의 집에 자신을 데려간다. 

 우리나라에서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당연한 목표 혹은 통과의례로 여긴다. 그래서 안정된 거처를 소유하기 위해 큰 빚을 내고 당연하게 그 빚을 갚으며 살아간다. 미국도, 일본도, 우리나라도 그러한 양상은 모두 비슷하다. 미래에 대한 대비로 결국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삶에서 빚만 갚다 죽는 것은 서글프다. 삶은 절대로 예측 가능한 형태로 살아지지 않는데 말이다. 온전한 자신의 집 하나를 갖기 위해서, 부모에게 물려받을 것 없는 모두가 겪어야만 하는 이 고군분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는 집이 필요한데 왜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은 것일까. 나는 예전부터 의문이었다. 우선 집에게 삶을 내걸 만한 가치가 있는 지부터 따져봐야 하는 것 아닐까.     

무엇도 약속되지 않는 삶
 점점 예측 불가능해지는 삶의 조건들 속에서, 삶이 그 무엇도 약속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져간다. 내가 보기에 '더 파더'와 '노매드 랜드' 모두 그렇게 삶에게  뒤통수 맞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비단 픽션 속에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은 더 잔인하다. OECD 노인 빈곤율 1위, 노인 자살률 1위에 빛나는 국가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절로 그 사실을 배운다.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집을 나를 두르는 겉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두 영화를 보며 깨달은 것은 결국 나를 둘러싼 모든 조건들이 사라져도 남는 것은 딱 하나, 나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나와의 우정이다. 나와의 우정을 잃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집이 나를 두르고 있다고 해도 나는 나로부터 소외될 것이다.

과연 나에게 허락될 삶은, 노매드가 되어 길 위에서 스스로와 철저히 마주하는 삶일까, 집을 마련한 뒤 소진 되어 모든 것을 잊고 나의 머릿속에 갇히는 삶일까. 혹은 둘 다일까. 내 집에 대해 생각하려다, 내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내 집 마련에 대한 수많은 이들의 고군분투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일부 도시의 집값, 그러한 현상을 통해서 배 불리는 사람들이 누군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무엇도 갖고 죽을 수는 없다는 것, 두 영화가 내게 다시 확인시켜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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