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진돼지만이 살아남았다의  책 겉표지= 박정애 칼럼니스트
훔진돼지만이 살아남았다의 책 겉표지= 박정애 칼럼니스트

[오피니언타임스=박정애 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넷플릭스를 통해 ‘지옥’이라는 드라마를 봤다. 어벤져스의 모습을 닮은 저승사자가 갑자기 나타나 ‘너는 몇 날 몇 시에 지옥에 갈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면 예언을 받은 사람은 어김없이 그날 그 시에 온갖 잔인한 폭력 속에 살해를 당한다. 나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지옥행을 예언 받은 그 순간부터 이미 지옥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와 상관없이 나는 올 일 년 동안 수시로 ‘지옥’을 떠올렸다. 비질(Vigil)을 다니다 보면 도살장이야말로 실존하는 지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태어난 순간 지옥이 마련된 축산 동물들. 그들에게 가해지는 맹목적 고통을 목격하고 난 뒤부터 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에 좀 무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드라마 지옥에서는 정진수(유아인 분)가 살해당하는 장면이 가장 오랫동안 방영되었다. 그가 사자들의 잔혹한 폭력에 무참히 죽어가는 모습은 참담함의 극치였다. 그런데 나는 그 장면에서 주인공 대신 도살장에서 죽어갔을 소, 돼지, 닭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같은 인간이기에 그가 잔인하게 폭력을 당하는 모습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우린 같은 동물이 아닌가.

또 드라마 ‘지옥’에서는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지옥행의 예언을 받는다.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부모가 대신 목숨을 잃는 장면은 참으로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난 지 한 달 된, 육 개월 된, 두 돌도 안 된 어린아이들이 철창에 갇혀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깊은 연민의 샘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축산 동물을 향한 나의 이 과몰입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불편함을 주는지 모르지 않는다. 나 역시 비질(Vigil)을 통해 도살장에 끌려 온 동물과 마주하고 그들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나의 감수성의 나침반이 인간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좋아했던 나는 정기적으로 단골 고깃집에 가곤 했다. 그곳을 운영하는 중년의 부부는 그냥 고기만 굽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에게 일일이 다정하게 말도 걸어주었다. 어느 날 대화 중,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 굽는 거예요. 이거 안 해도 먹고 살 수만 있으면 왜 하겠어요.” 미소 속에 새 나온 가느다란 한숨 소리를 나는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만약 나 역시 자영업으로 고깃집을 선택했다면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서 고기를 구울 수밖에 없고 ‘동물권’이니 뭐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빨리 돈이나 많이 벌어서 일 좀 안 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수도 있다. 또한 만약 내가 도살장에서 밥벌이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면, ‘진실의 증인되기’ 어쩌고 하며 떼로 몰려온 활동가들의 행위가 참 한심하고 사치스럽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밥벌이’를 해야 하는 인간의 굴레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기에, 그 고통에 공감하는 만큼 삶이 통째로 지옥인 축산 동물의 생애에 대해서는 외면하려고 애썼다. 그랬던 내가 축산 동물이 처한 현실을 마주한 순간 지극히 인간적인 희로애락만을 얘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 이후 나는, 이제 더는 벚꽃과 단풍과 설경에 대한 감동을 노래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법률에 대한 경악으로 가슴 속에 자꾸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꽃으로도 때려서는 안 되는 사랑스러운 아기들의 젖살과 연말이면 들려오는 미담의 주인공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면 뭔가 쓸 때마다 자꾸만 눈치를 보게 되는 초라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까지도 나는, 온몸에 똥칠한 돼지와 뼈와 가죽만 남은 젖소와 이제 곧 거꾸로 매달려 목이 잘릴 어린 닭의 지친 표정을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내 동물권 활동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준 어떤 사람들. 바로 그들이 쓴 비질(Vigil), 공개구조 그리고 새벽이생추어리(Sanctuary: 피난처, 안식처)가 탄생하기까지의 경이로운 기록이 담긴 책 한 권을 펼친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한 해를 돌아보며 그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세상이 뭐라든 그들은 내 마음의 귀인(貴人)들이다. 

박정애 칼럼니스트= 오피니언타임스
박정애 칼럼니스트= 오피니언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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