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kbs뉴스 유튜브 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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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청년칼럼니스트] 지난주에는 치킨 드셨어요?수업 때마다 학생 하나가 꼬박꼬박 물었다. 나는 학생의 질문 앞에서 늘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제 염치 따위는 씹어 먹을 나이가 된 듯하다.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적 없는, 뚱뚱한 아저씨다.

2018년 42마리, 2019년 42마리, 2020년 61마리, 2021년 60마리. 최근 4년 간 연평균 약 50.75마리, 주당 거의 한 마리를 먹은 셈이다. 이만 하면 배달음식이 아니라 가정식이다. 그러나 내게 치킨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내 입맛은 사춘기 중이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사춘기 청소년들과 취업을 앞둔 청년들은 꿈을 갖지 않는다. 무엇을 꿈꾸든, 그 꿈은 재능 있는 소수에게만 허락될 일이라는 것쯤은 중학생도 안다. 개천에서 승천한 몇 마리의 용을 소개하며 ‘너도 할 수 있어!’라고 하는 것은 기만이다. 용도 이무기나 되어야 꿈꾸고, 될 성부른 이무기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떡잎이 평범하거나 부실한 절대다수에게 ‘자아실현’은 구닥다리 인생관이 되었다. 이제는 ‘입맛실현’의 시대다.

먹방이 범람했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즉각적인 쾌락은 꿈에서 추방된 평범한 패배자들의 낙원이 되었다. 패배자들은 패배자 이외의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자신의 입맛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사람들은 흔해빠진 라면을 먹을 때도 자기만의 레시피를 찾아 나갔다. 입맛의 개별성은 SNS로 소통하며 융합과 분리를 반복하며 입맛조차 사회화되었다. 절대다수의 패배자들은 자신의 입맛이 무엇인지는 폭 넓고 구체적으로 알게 되며 소소하게 행복했다.

입맛은 유례없는 대항해시대를 열며 미지의 맛을 찾아 나갈 정도로 진취적이다. 신호등 치킨은 무모했을지 모르나 시대정신을 이끈 선구자다. 가장 많이 먹은 입맛이 가장 멀리 갔다. 누군가 맛의 신대륙을 발견하면 후발주자들은 한 끼를 위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줄을 섰다. 진심을 둘 데를 몰라 맛에 필사적으로 진심이었다.

한때 그들을 비난했었다. 먹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한심한 족속이었다. 그러나 시간과 에너지를 자아실현에 쓴 내 꼴이 이러고 보니, 요즘은 인생을 먹고 싸는 사태로 단순화 하며 하쿠나마타타 하는 그들이 부럽다. 다시, 내게 치킨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글쎄다.

소비자 대중의 맛 감별 수준이 역사상 가장 예민해진 시대, 맛의 다양성 논리를 압살하며 맛의 천하를 일통한 배달 음식의 왕이 있었으니, 치킨이다. 짜장/짬뽕은 배달 오면 면이 퍼지기 시작하고, 피자는 치즈가 굳어가기 시작하고, 족발은 비쌌다. 치킨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는 민트초코나 파인애플 피자로 논쟁하던 무리들도 한 마음이 된다.

심지어 ‘부먹vs찍먹’ 논란에서 양념치킨은 논외 대상이고, 통닭이 아니라 chicken인 주제에 한식이다. 튀겨서 맛없는 것은 없다는데 치킨은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대적불가, 절대지존, 천하무적, 치느님의 위엄이시다.

치킨도 20,000원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실질 구매가는 10년 전과 대동소이했다. 배달 앱에서는 늘 행사 중이었다. 요일마다 다른 브랜드를 할인했고, 때로는 이런저런 명분으로 쿠폰을 뿌렸다.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페이코, 토스는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수시로 결제 할인을 더했다. 어쩌면, 나 같은 사람이 많아 하필 치킨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치킨이 먹고 싶어서 치킨을 먹는다기보다는 맛있는 무언가를 먹고 싶을 때 치킨을 먹었다. “How are you?”를 들었을 때, “Fine, thanks and you?”가 자동으로 나오는 것과 같은 기작이었다. 치킨은 양념 맛으로 먹는다는 말에 공감했다. 먹고 또 먹으며 치킨에 둔감해지고 보니 고기 맛은 거기서 거기였다. 처음 두세 조각까지는 맛있지만 먹다보면 내가 먹고 싶었던 것이 치킨이 아니었던 사실에 허탈해졌다.

치킨을 먹는 순간에도 맛있는 것이 먹고 싶었다. 내 치킨은 유부남들의 ‘의무방어전’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식욕에 대한 의무 이행과 다름없었다.자아실현에 매몰되어 나를 방치한 사이,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자기 입맛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었다. 단언컨대,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삭막한 일상에 입맛을 반짝일 수 있다면 자아실현에 실패한 대다수는 결코 패배하지 않은 게 아닐까?

우리에게 찍힌 패배자의 낙인은 ‘자아실현’ 신드롬이 만들어낸 근현대의 망령이다. 멕시코만의 늙은 어부와 높이 날던 갈매기가 패배감과 싸워가며 누린 행복의 총량이 생물학을 충실히 따른 이들의 행복의 총량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생물이다. 생물로서의 행복을 평가절하 하며 고고한 척하느라 자기 입맛도 모른다면 소용없다. 나는 갈수록 치느님이 보우하시기도 힘겨워짐을 느낀다. 더군다나 AI의 등장으로 자아실현 확률이 급격히 낮아질 시대, 이제는 입맛실현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가 시장 통닭을 사왔을 때를 기억한다. 만화캐릭터처럼 방방 뛰었다. 통닭을 케첩에 찍어 먹었고 동생보다 더 먹으려고 늘 다투었다. 엄마가 이 정도는 당신도 할 수 있겠다며 집에서 양념치킨을 만들어 그 위에 땅콩가루를 뿌려줬을 때, 콩닥콩닥했던 설렘도 기억난다. 그러나 이제는 도통 느껴지지 않는다. 자아실현의 가능성은 점점 물 건너가고, 어차피 먹고 또 먹을 치킨, 온 가족이 오순도순 치킨 한 마리, 내 새끼 입에 들어갈 치킨 한 조각, 가지지 못할 기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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